1794년 3월27일.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이 ‘해군법’에 서명했다. 골자는 해군 부활. 예산 68만8,889달러를 투입해 프리깃 6척을 건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3년1개월 뒤 첫 번째 프리깃 ‘유나이티드스테이츠’호가 진수됐을 때 미국은 비로소 해군 함정을 보유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해군이 없었다는 얘기일까. 그렇지는 않다. 독립전쟁에서 대륙 해군은 비교가 되지 않는 상대인 영국 해군을 가끔 괴롭혔다. 독립한 후 신생 미국은 20척에 이르던 함선을 모두 민간에 팔았다. 유지비용이 과도하다는 이유에서다. 1785년 마지막 함정을 매각한 이래 미국은 10년 가까이 ‘해군이 없는 나라’였다.
미국이 돈 때문에 포기한 해군을 부활시킨 것은 돈과 명예 때문. 알제리에 근거하며 지중해를 주름잡던 이슬람 해적들이 미국 상선 13척을 나포하고 거액의 ‘상납’을 요구하자 해군력 건설에 나섰다. 함정 건조 자체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삼림 자원이 고갈된 영국이 북미 식민지에 대한 산업기술 이전은 극도로 경계하면서도 조선업 하나만큼은 정성껏 키웠기 때문이다. 풍부한 산림을 지닌 미국의 조선업은 식민지 시절부터 유럽보다 36~68% 싼 가격에 배를 만드는 경쟁력으로 이름 높았다.
막상 함정 건조는 마냥 늘어졌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여건 변화. 해군법 입법 당시 다수당인 야당은 평화가 온다면 함정 건조를 중단한다는 단서 조항을 넣었는데 1796년 봄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건조 작업의 전면 중단 상황에서 워싱턴 대통령이 의회를 설득해 3척은 건조한다는 동의를 어렵게 얻어냈다. 두 번째 문제는 돈. 건조 작업이 지연되고 해군의 요구성능이 많아지면서 건조비가 올라갔다. 함선 3척은 가까스로 건조했지만 운용할 돈이 모자랐다.
마침 프랑스와의 외교 마찰로 상선 나포 경쟁(미불 유사전쟁)이 격화하자 건함 계획도 온전히 살아났다. 결국 세 차례의 증액 끝에 총건조비는 당초 계획의 2.3배인 157만7,922달러가 들어갔다. 난산 속에 태어난 ‘최초의 6척(the Original six frigates)’은 제 역할을 다해냈다. 1812년 발발한 영미전쟁에서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겨루고 1815년에는 이슬람 해적을 완전히 몰아내 유럽 각국을 놀라게 만들었다.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미국 해군이 이런 과정을 거치며 태어났다. 의회 표결은 언제나 근소한 차이로 해군의 손을 들어줬다. 안보 앞에서 의원들이 당적(연방당·민주공화당)에 관계없이 소신 투표한 덕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