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103세에 붓질…그의 線은 바람이다

■현역 최고령 김병기 화백 개인전

서양화 1세대 父 영향으로 화업

이중섭과 절친, 韓미술사 산증인

"동양성 갖고 포스트모더니즘"

구상과 추상 경계서 색다른 조화

작년·올해 작업한 20여점 선봬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103세의 화가 김병기.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103세의 화가 김병기.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




김병기 ‘동쪽 산의 황혼’ 2018년, 캔버스에 유채, 65.1x100cm김병기 ‘동쪽 산의 황혼’ 2018년, 캔버스에 유채, 65.1x100cm


김병기 ‘산 동쪽’ 2018년작,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김병기 ‘산 동쪽’ 2018년작,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


휙휙 내리긋는 손길에 거침이 없다. 그은 선(線)은 면이 되기도 하고, 산을 그리고 바람을 일으키곤 한다. 1916년생으로 올해 103세를 맞이한 현역 최고령 화가 김병기(사진)가 그린 최신작 ‘산의 동쪽’이다.

김병기의 개인전 ‘여기, 지금’이 10일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개막했다. 이 날은 작가의 103번 째 생일이다. 전시장을 채운 20여 점 대부분이 지난해와 올해 완성한 최근작들이다.

김병기는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김관호와 더불어 근대기 한국의 ’1세대 서양화가’였던 김찬영(1889~1960)의 아들이다. 아버지 김찬영은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학했지만 정작 귀국 후 그림을 접은 반면 그 재능을 피로 이어받은 김병기는 세기를 넘어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김병기는 마흔에 요절한 이중섭과 동향에 동갑이다. 둘은 평양 종로보통학교 6년 내내 같은 반 단짝이었다. 절친한 벗 이중섭은 일찍 죽어 신화가 됐고, 김병기는 오래 살아 새로운 기록을 쓰는 전설이 됐다. 김병기는 일본 유학시절에 김환기와 함께 그림 공부를 했고 시인 이상을 하숙방에 재워주기도 했다. 해방 후 ‘반동’으로 의심받다 월남을 택한 그는 한국전쟁 후 종군화가로 고향에 다시 갔으나 결국 밀려 내려왔다. 피난 통에 장욱진, 박고석과도 교류했으니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산 증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 화백은 “내가 이중섭과 유영국, 김환기와 박수근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은 잘 알기 때문”이라며 “그 바람에 내가 종종 조역처럼 묘사되는데 나는 나대로 주역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1913년생 김환기나 동갑내기인 이중섭·유영국과 비교했을 때 몇 배나 더 긴 세월 그림을 그려온 스스로를 가리켜 “단거리 선수가 아닌 장거리 선수”라고 강조했다. 서서 그림 그리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다리가 부어 고생했을 뿐, 지난해 폐렴으로 잠시 병원 신세를 진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건강한 편이다. 기억력도 생생하고 목소리도 우렁차다. 평양냉면을 즐기고 손흥민이 출전한 축구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 밤을 새기도 할 정도로 정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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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예술이 닮았어요. 축구를 계산으로만 한다면 패스만 하겠죠. 계산을 넘어선 순간에 골이 터지듯 예술도 계산을 넘어선 순간에 작품이 나오더라는 것이죠. 그렇게 초이성적이며 감성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출품작 대부분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서 색다른 조화를 이룬 김병기의 대표작들이다. 창 너머로 내다본 산, 탁자 위에 놓인 감들을 그린 것 같지만 추상화다. 작가 스스로 “추상을 통과하고, 오브제를 통과하고, 다시 수공업적이고 원초적인 선으로 돌아왔다. 다 통과한 뒤의 종합적인 단계가 지금의 내 세계”라고 설명하는 작품들이다. 자유롭게 그은 검은 선들에서 청춘보다 더 뜨거운, 평생을 바치고도 모자라 말년까지 불태우는 노화가의 열정이 감지된다.

“밤새워 그림 그리던 피카소를 존경하는데, 나 역시 여전히 ‘나인 투 파이브(오전 9~오후 5시 일과시간)’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림 안 그리는 때는 무위(無爲)의 시간이니 그럴 때면 노자가 떠오르곤 합니다.”

때때로 누드화도 그린다. 거침없는 연주홍빛 선들 사이에 벌거벗은 여체를 숨겨 놓은, 추상화에 가까운 누드지만 꼭 모델을 앞에 두어야 ‘그림이 된다’ 한다. 피부색 같은 그림에는 폴 발레리의 시 구절에서 딴 ‘살아야 한다’를 제목으로 붙이기도 했다. “추상화가처럼 작품 활동을 했지만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형상성을 떠날 수 없었다. 형상과 비형상은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작가는 “20세기는 양식을 만든 시대였고, 21세기는 그 양식을 부수기도 한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들 하는데 나는 나대로 동양성을 갖고 포스트모더니즘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다음 달 12일까지.
·사진제공=가나아트갤러리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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