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칠면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매일 오전9시만 되면 주인이 맛있는 식사를 차려준다. 이제껏 주인은 한 번도 그 칠면조의 식사를 거른 일이 없었다. 눈이 오는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항상 식사는 오전9시면 어김없이 나온다. 정말로 고마운 주인이 아닐 수 없다. 칠면조는 점점 살이 찌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9시에 주인의 행동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맛있는 식사 대신에 칼을 들고 왔다. 추수감사절 오전9시에 그 칠면조는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경이 말해주는 예화다. 핵심 포인트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근거로 미래를 예측하는 귀납법은 오류라는 것이다. 오늘 오전9시까지 예외 없이 식사가 나왔다는 사실이 내일도 식사가 9시에 나올 것이라는 근거가 절대 될 수 없다. 칠면조는 어리석게도 영원히 식사가 아무런 대가 없이 공짜로 주어질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가졌다. 심지어 주인에게 고마워하면서까지.
중국에 돼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 돼지 뒷 잔등에 이 4마리가 올라탔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4마리는 돼지 피를 빨아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여기저기 왔다 갔다만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서로 가장 좋은 식사 장소를 선점하려고 기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그런데 이 기 싸움이 장난이 아니다. 도대체 돼지 살 뜯어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서로를 견제하기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한 마리가 추가로 도착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우리가 올라타 있는 이 돼지가 이번 주인댁 제삿날 제사상에 오른다는 특급 정보가 있는 것 몰라. 까딱하다가는 국물도 없을 거야.” 이제 좋은 목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먹고 볼 일이다. 이제 이 5마리가 서로 경쟁적으로 돼지 살을 왕성하게 먹어 치운다. 돼지는 나날이 말라만 간다. 결국 주인은 그 삐쩍 말라 비틀어진 그 돼지를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 다른 돼지가 대신 올라간다. 이도 좋고 돼지도 좋고 둘 다 윈윈한 것이다. 중국의 철학자 한비자의 우화다.
프랑스에 죄수 한 명이 있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 왕 앞에 불려 왔다. 왕은 이리저리 취조하고 난 후에 사형을 내린다. 그런데 좀 특이한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한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1주일 내 너를 사형에 처하겠다. 그런데 내가 어느 날에 사형을 할지 네가 알 수 없는 날에 사형이 집행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감방에 돌아온 죄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1주일 내로 죽는다. 그런데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날에 사형은 집행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형수는 자신의 미래를 예측해보기로 한다. 당시에 사형은 반드시 낮12시에만 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러면 맨 마지막 날인 일요일 낮12시에 왕이 사형을 집행할 확률이 있는가. 일요일 낮12시에 나를 죽인다는 것은 토요일 낮12시까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나는 토요일 낮12시1분이 되면서 내가 일요일 12시에 죽도록 돼 있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니 일요일 12시에 나를 죽일 일은 절대 없다.
그러면 토요일 12시에 내가 죽을 확률은 마찬가지로 제로다. 왜. 금요일 12시까지 살아 있어야만 토요일 12시에 죽을 수 있으니까 금요일 12시1분에 나는 토요일에 죽을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토요일 12시에 죽을지 일요일 12시에 죽을지 어떻게 금요일 12시1분에 알 수 있는가. 일요일에는 절대 나를 죽일 수 없으므로 확률계산에서 아예 빼버리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런 식으로 하면 어느 날도 나는 예측하지 못하게 죽을 수 없다고 죄수는 생각하면서 쾌재를 부른다. “결국 왕은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말을 유머 있게 한 거야.” 그러다가 수요일에 간수가 왔을 때 죄수는 “어. 오늘일 수 없는데…”하면서 끌려가서 죽는다.
칠면조는 죽는 날까지 행복하게 잘 먹다가 갑자기 죽는다. 돼지는 죽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살이 빠지면서 죽음을 면한다. 사형수는 혼자 미래를 예측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죽고 만다. 돼지가 이번에는 운 좋게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법이 없다. 살아남으려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지 말라. 미래는 대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