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 역사에서 대기업과 거래하다 망한 곳은 있어도 중소기업과 주로 거래하다 망한 사례는 전무(全無)합니다. 중소기업 전문은행을 설립해 은행과 고객 중기가 모두 잘 되는 모델을 만들겠습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중기중앙회관에서 열린 서울경제 인터뷰에서 중기 전문은행(가칭 KBIZ 은행)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같이 말했다. 여신 상환 측면에서 중소기업의 리스크가 대기업에 비해 더 클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김 회장의 주장이다. 때문에 중기 전문은행을 설립하면 은행은 우량 고객을 확보해 발전해 나갈 수 있고 동시에 중기 금융 인프라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중기와 주로 거래한 IBK기업은행, 서민과 주로 거래한 KB국민은행 모두 엄청나게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기업은행은 이미 증시에 상장한 대형 상업은행이 된 만큼 진정한 중기 전문은행이 새롭게 필요합니다.”
김 회장은 중기 전문은행 설립에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 모델을 벤치마킹하겠다고 밝혔다. 그라민뱅크는 무함마드 유누스 박사가 설립한 서민 전용 은행이다. 빈자들에게 돈을 빌려줘 빈곤 퇴치에 기여하면서도 은행도 발전해 나갔다. 유누스 박사와 그라민뱅크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라민뱅크의 대출 부실률이 0.1%라는 겁니다. 그 은행이 가난한 사람한테 500달러, 1,000달러 꿔주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부실률이 그렇게 낮아요. 한국의 중소기업도 부실률이 낮은 우량고객입니다. 그라민뱅크 모델을 벤치마킹해 중기 전문은행을 설립하면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중기 금융환경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대출이 신용이나 기술이 아닌 담보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데다 기업의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축소하면 일부 상환을 요구받기 일쑤다. 김 회장 측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은행권의 중소기업 담보 대출 비중은 지난 2010년 말 54.1%에서 2017년 말 71.2%까지 상승했다.
김 회장은 중기 전문은행이 1조 원 이상의 자본금을 갖고 출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소액 출자자 위주로 지분구조를 만들어 ‘주주가 곧 고객이 되는’ 형태로 은행을 운영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중기 전문은행 만든다고 하면 50~100억 원 출자할 곳이 많다. 뭉칫돈을 댈 주주가 필요 없다”면서 “좋은 주주와 우수 고객을 동시에 보유한 은행을 설립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임기인 2023년 2월까지 중기 전문은행을 설립하고 향후 은행 업무 뿐 아니라 보험, 증권, 보증보험까지 서비스하는 토털 금융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하겠다는 게 김 회장의 복안이다.
김 회장은 “우선 급한 현안부터 처리한 뒤 내년부터 관련 연구용역 발주, 현장 실수요 조사 등을 시작하겠다”면서 “중기 전문은행 필요성에 대한 확실한 논리를 개발하고 정부와 국회에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중기 전문은행 성공을 확신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자신이 과거 주도한 사업인 노란우산공제의 성공경험이다. 김 회장은 “중기와 자영업자의 사회안전망 차원에서 기업은행에서 30억 원 지원받아 시작한 사업이 부금 10조원 규모로 커졌다”면서 “노란우산공제처럼 중기 전문은행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노란우산공제에 안전자산 투자 일변도를 벗어나 수익률을 높이기 방향으로 포트폴리오를 다시 짤 것을 최근 주문했다. 김 회장은 “연말이면 대체적인 윤곽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지난 2007년부터 2015년까지 8년간 제23~24대 중기중앙회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4년 만에 26대 중앙회장으로 컴백한 이유는 뭘까. 무슨 아쉬움이 남아서 그 어려운 선거를 거쳐 여의도에 돌아왔을까.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로부터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을 들었어요. 김기문이 한 번 더 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이 나왔어요. 그래서 지난해 10월 선거를 넉 달 남기고 어렵게 출마를 결심했습니다. 중기중앙회장은 권력이나 권한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입니다. 경기침체와 급격한 노동환경 변화 속에 한계상황에 몰려있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입장과 목소리를 잘 대변해야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 8년의 경험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면서 “중소기업계의 굵직한 현안은 물론 개별 기업과 조합들이 가지고 있는 미시적인 애로사항까지 헤아리는 심부름꾼이 되는 한편 (정부와 정치권에) 당당하게 할 말하고 할 일하는 중앙회장이 되겠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앞으로 △중소기업 지원 △협동조합 지원 △중앙회 개혁 등 세 가지 큰 틀에서 업무를 추진할 계획이다. 중기 지원 차원에선 표준원가센터를 설립해 원자재, 인건비 등을 반영한 업종별·품목별 표준원가를 제공하고 가업승계 제도 개선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각종 노동현안에도 적극 대응할 방침이다. 앞서 언급한 KBIZ 은행 설립도 중기 지원 차원의 프로젝트다.
협동조합 지원을 위해서는 우선 협동조합법 개정을 추진해 중소기업 공동사업을 활성화시킨다는 방침이다. 또한 협동조합 수의계약 규모를 상향하고 협동조합 판로확대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종합레저단지를 건립해 협동조합·중소기업 교육과 세미나도 지원할 방침이다. 김 회장은 “일본은 협동조합이 3만 개인데 한국은 800~900개이고 이 중 활동하는 건 600개에 불과하다”면서 “주물산업과 같은 뿌리산업부터 국내에 존재해야 산업 인프라가 형성되고 국가 생산성이 올라가는 만큼 업종·지역별 협동조합 활성화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회 개혁은 재무구조 재구축과 정책 개발 역량 강화에 대한 내용이다. 특히 중앙회의 재정 측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이 같은 여러 가지 목표 중에서도 중소기업계가 당면한 가장 급한 현안은 노동 관련 문제다. 김 회장은 우선 최저임금에 대해 “내년부터는 동결돼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기업 규모·업종별 최저임금 차등화에 대해서는 “업종별 차등화는 적절치 않고 소상공인에 대해 구분 적용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탄력적 시간근무제 단위 기간은 1년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안된다면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앞서 합의한 6개월로라도 시급히 확대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유연근무제 정산 기간을 1개월에서 3개월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주휴수당에 대해서 김 회장은 “실제 일하지 않은 가상의 시간인 만큼 폐지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휴수당을 법적으로 강제한다면 최저임금 결정 시 주휴수당을 포함한 금액을 기준으로 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 말대로 최저 임금에 주휴수당을 포함시키면 올해 최저 시급은 8,350원이 아니라 1만20원이 된다. 이 방식이면 문재인 대통령의 ‘최저임금 1만원 시대’ 공약이 이미 달성된 것이고 추가적인 최저임금 인상 논의는 당분간 피할 수 있다는 논리다.
김 회장은 정부와 국회 등에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지원을 확대해 달라고도 호소할 계획이다. R&D야 말로 지속가능 기업의 핵심이라는 게 김 회장의 평소 신념이다. 특히 김 회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R&D 격차가 커진 것을 우려하고 있다. 김 회장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기업의 R&D 투자 중 중소기업 R&D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26.6%에서 2017년 21.9%로 축소됐다. 김 회장은 “국가 R&D 사업을 기획할 때 중기 현장 의견 반영을 확대해야 한다”면서 “R&D를 열심히 하는 중기에 대한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등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이 같은 노력이 모아졌을 때 비로소 청년이 일하는 중소기업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김 회장은 “올해 3월 청년 실업률은 10.8%로 전체 실업률 4.3%보다 크게 높지만 청년은 여전히 중소기업 근무를 기피한다”면서 “중소기업이 신나게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좋은 중소기업이 늘어나고 결국 이 같은 일자리 미스매칭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소상공인과의 연대도 강화할 방침이다.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은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똑같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앙회 내에 최근 ‘소상공인정책부’를 신설했다. 김 회장은 “곧 소상공인연합회 측과 미팅을 할 것”이라면서 “같이 목소리를 낼 사안과 각자 주장할 내용이 무엇인지 등을 조율해 보다 효율적인 의사 전달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리=맹준호기자 next@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