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설계) 팹을 국내 1위 팹리스(설계전문) 업체인 LG그룹의 실리콘웍스 등 국내 중소업체에 개방하기로 했다. 취약한 국내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고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차원에서다. 2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정부는 이달 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이런 내용을 뼈대로 한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방안을 발표한다. 이번 대책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이미지센서(CIS) 등을 만드는 시스템 반도체 육성 △대만 TSMC를 추격 중인 파운드리 초격차 확대 △산학 협력을 통한 국내 인재 양성 등과 관련한 방안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 파운드리사업부가 고객 포트폴리오를 퀄컴 등 해외 대형 업체 위주에서 실리콘웍스 등 국내 업체로 확대하기로 한 점이 눈에 띈다. 현재 삼성 파운드리의 국내 파트너는 텔레칩스 등 극히 일부 업체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국내 중소형 팹리스들은 대만 파운드리 업체, DB하이텍 등에 물량을 맡기는 실정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임원은 “삼성이 국내 팹리스에 문호를 활짝 연다면 설계 등 비메모리 분야로 인재 유입이 많아질 것”이라며 반겼다.
앞서 올해 초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오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오르겠다”고 밝혔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비메모리 시장 규모는 2,337억달러(2018년 기준)로 메모리(1,568억달러)의 1.5배에 이른다.
정부도 ‘미래 육성 3대 산업’ 가운데 하나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결정하고 정책적 지원을 확대할 방침이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팹 개방으로 이어지는 비메모리 반도체 생태계 확대는 신성장동력과 동반성장, 일자리 창출이라는 정부의 혁신성장 로드맵과도 일치한다. 업계에서는 메모리에 편중된 반도체 산업의 영역 확장과 전후방 산업 연관효과 극대화를 노리기 위해서는 비메모리 부문의 육성이 필수 과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던 만큼 민관과 기업 간 공조를 통한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상훈·윤홍우·박효정기자 shlee@sedaily.com
삼성 ‘대·중기 상생’ …국내 팹리스 키울 비메모리 생태계 조성한다
■삼성 내주 비메모리 육성책 발표
비메모리, 가격 변동 폭 크지 않아
시황에 영향받는 ‘메모리 편중’ 해결
글로벌 시장규모도 비메모리가 2배
국내 팹리스 대만업체에 물량 맡겨
삼성 결정에 “인재 유입 많아질것”
2030년 비메모리 1위 전략 시동
정부와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를 육성하려는 이유는 지금처럼 메모리 반도체에 편중된 산업 구조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이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메모리 반도체 업황 호조에 힘입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둔화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자 삼성전자는 올 1·4분기에 이례적으로 ‘어닝쇼크’를 예고하기도 했다.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한국 경제 전체를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메모리 반도체가 호황이었던 지난해 수출이 사상 최고였다면 올해는 메모리 시황 악화로 수출은 물론 성장률까지 위협받고 있다.
정부도 그간 수차례 한국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초 기업인 간담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 회장을 만나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이 부회장을 향해 “요즘 반도체 경기가 안 좋다는데 어떠냐”고 물었고 이 부회장은 “좋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죠”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이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자 이 부회장은 “집중과 선택의 문제”라며 “기업이 성장하려면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기업인 간담회 이후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반도체 시장 상황을 꼼꼼히 챙겨볼 것을 지시했다. 특히 정부는 최근 들어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윤 수석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와 관련해서는 그동안 업계 관계자 등 다양한 전문가를 포함해 만났다”며 “생태계 강화, 반도체 대학 학과 등 인력 양성, 수요 기업과 반도체 기업과의 상생협력 등에 중점을 둬 대책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메모리반도체 산업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를 키울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규모가 메모리 반도체를 크게 웃돈다는 점을 감안 하면 잘만 육성하면 향후 수십년 간 한국을 먹여 살릴 먹거리가 될 수 있는데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시황 변동성이 큰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비메모리 반도체는 변동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4,837억 달러 규모이며, 이중 비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3,212억달러로 66%를 차지한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1·2위를 달리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도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라 향후 성장 잠재력이 풍부하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에서 비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5% 수준이며, SK하이닉스는 1%에 불과하다. 업계도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이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삼성전자는 ‘2030년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1위’라는 목표를 세우고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 사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도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 의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어 지금이야말로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정부와 산업계가 힘을 합쳐 속도를 낼 때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선우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산학의 조화가 필요한 분야”라면서 “그간 업계는 수익성이 높은 메모리 분야에 집중하느라 비메모리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고, 학계에서는 우수한 인력이 공급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번에 정부와 산업계가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 기대가 크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이번에 정부와 삼성전자가 발표하는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에 △시스템 반도체 육성 △파운드리 1등과 격차 축소 및 파운드리 국내 팹리스에 개방 △산학 협력 통한 국내 인재 양성 등이 담길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가 힘을 싣고 있는 파운드리 관련해서서는 국내 팹리스 업체에도 문을 열겠다는 뜻을 밝힐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그간 파운드리를 텔레칩스 등 국내 일부 팹리스 업체에만 제한적으로 개방했으며, 국내 2위인 DB하이텍만 국내 펩리스 업체의 물량을 받아 제작해왔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그간 국내 펩리스 업체들은 규모가 작아 상대하지 않았다”면서도
“이번에는 생태계 강화 차원에서 중소 펩리스 업체와의 협력 방안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관련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도 비메모리 반도체 육성과 관련해 국내 최대 업체인 삼성전자의 투자 흐름 등에 맞춰 전반적인 생태계를 육성하는 전략을 고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파운드리, 팹리스, 디자인하우스 등 다양한 비메모리 분야에서 인력을 고급화하고, 기업 간에 상생협력을 높이는 방안이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 관계자는 “업계에서 가장 큰 업체가 삼성전자인 만큼 삼성은 삼성 대로의 계획을 갖고 있고, 산업부는 삼성전자와 생태계를 육성할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고병기·윤홍우·강광우 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