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경리단길에 위치한 한 건물은 통째로 비어 있다. 얼마나 오래 공실 상태였는지 건물 앞에는 ‘수도요금 체납 단수예고 고지서’가 붙어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원조 맛집들이 사라지고 두세 가게 건너 ‘임대문의’를 내건 점포들은 요즘 경리단길을 대변하는 풍경이 돼버렸다.
‘~길’로 한국의 골목상권을 대표하던 신흥상권들이 쓰러져 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에 임대료 인상과 경기침체 심화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 따른 것이다. 서울시 상권분석 자료에 따르면 원조 신흥상권인 경리단·삼청동길 두 곳에서만도 4년간 문을 닫은 점포가 300여곳에 이른다.
본지가 최근 찾은 경리단길은 시쳇말로 ‘폭망한’ 상권으로 불릴 만했다. 행인조차 빈 건물이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종로구 삼청동길도 예외는 아니다. 이곳에서 1년째 임차인을 찾지 못한 점포도 수두룩하다.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는 “가끔 새로운 점포가 문을 여는데 이들도 6개월 정도 장사하다 버티지 못하고 나간다”며 “보증금도 다 까먹고 시설 권리금조차 받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핫플레이스’로 부상한 곳에서도 위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마포구 망원동 ‘망리단길’은 2~3년 새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익선동이나 성수동길도 임대료가 오르면서 젠트리피케이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자영업자들은 생존을 위해 메뚜기처럼 신흥상권을 옮겨 다니지만 원조나 새로 뜨는 곳이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길’로 불리는 상권은 전국에서 20여곳에 이른다. /이주원·이수민·이재명기자 joowonmail@sedaily.com
<100만원 내려도 ‘텅텅’...삼청동 점포 10곳중 3곳만 생존>
# “오늘 첫 손님이세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경리단길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종업원은 기자에게 뜻밖의 말을 건넸다. 오후4시가 돼서야 첫 손님을 맞은 이 카페는 평일에는 하루 두세 그룹 정도밖에 찾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다. 그나마 주말이면 10개 남짓한 테이블이 차는 정도다. 3개월 전에는 와인 가게였다가 지금은 카페로 업종을 바꿨고, 그나마도 장사가 안돼 이제는 파티룸으로 리모델링해 대관 영업을 해보려 한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두세 건물 건너 불이 꺼진 채 ‘임대문의’만 붙어 있는 이곳에서 더 이상 장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바뀐다”고 털어놓았다.
# 서울 종로구 삼청동 거리에도 역시 임대문의를 내건 점포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건물은 독특하게 생긴 3층짜리 빌딩이다. 이 건물은 과거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회장이 론칭한 화장품 브랜드인 ‘문샷’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위치했던 곳. 주변 상인에 따르면 이 건물은 공실이 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공실이 생기면 1개월도 안 돼 주인이 바뀌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 들어서는 6개월에서 1년이 지나도록 공실로 남아 있는 점포가 수두룩하다.
지난 2010년 초반부터 뜨기 시작해 2015~2016년 황금기를 맞았던 원조 신흥상권인 경리단길과 삼청동길의 현주소다. 서울시 상권분석 자료에 따르면 경리단길(이태원 1동 기준)의 5년 점포 생존율은 2016년 말 42.8%에서 현재는 36%까지 추락했다. 삼청동 역시 이 기간 동안 44.3%에서 35.1%로 추락했다. 2곳 모두 가게 10곳 중 5년간 생존하는 점포가 3곳가량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도 임대료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감정원 통계에 따르면 임대료 지수는 수년째 보합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글프게 변해버린 ‘경리단길’=기자가 최근 찾은 경리단길은 베트남 쌀국수집이며, 네일숍이며, 휴대폰 대리점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수제 맥줏집이 줄지어 들어서며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던 경리단길은 이제 비어 있는 점포가 당연하다는 듯 마을 주민 몇 명만 돌아다닐 뿐이다. 건물 2~3곳 중 1곳은 비어 있을 정도로 심각했다.
문제는 상권이 텅 빌 지경까지 왔음에도 임대료가 내릴 기미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경리단길 빈 점포에 붙은 ‘일정 기간 렌트프리’ ‘가격 협의 가능’ 등 문구를 보고 경리단길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자 알아보는 타지에서 온 점주들이 최근 들어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금세 높은 가격의 벽에 부딪혀 돌아서고 만다.
경리단길 B 중개업소 대표는 “최근에도 망리단길에서 가게를 하시던 분이 경리단길이 임대료가 많이 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이분은 월 100만원짜리 가게를 원했고 결국 못 구했다”면서 “조정기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임대료를 대폭 낮추기보다는 차라리 공실로 남겨두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건물주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경리단길에서 전용 29㎡(9평)짜리 가게를 구하려면 월 150만원 이상은 돼야 한다는 게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외국인 관광객만 남은 삼청동길=삼청동길에는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만 남았다. 고즈넉한 골목에 갤러리와 카페가 들어서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곳은 정미소나 방앗간 같은 옛 마을의 추억이 담긴 공간조차도 젊은이들을 끌기 위한 음식점이나 카페 등으로 변경되며 옛 특색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한복대여점과 ‘ALL 5,000 WON’ 등의 문구를 걸어둔 잡화점이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인근의 한 중개업소 관계자에게 요즘 상황에 대해 묻자 “상권이 좋아지려면 관광객 같은 뜨내기손님이 많은 것보다 자주 오고 객단가가 높은 충성 고객이 많아야 하는 거 아니겠느냐”며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이곳에서 중개업소를 운영하는 B 공인 대표는 “현재 상권 권리금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지금은 6개월 ~1년이 지나도 공실 상태인 점포가 수두룩하다”며 “이런 침체가 2년 정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청동의 C 중개업소 대표도 “건물주들이 점포가 안 나가니 월 임대료를 50만~100만원씩 내리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라면서 “총리 공관 앞 삼거리에 위치한 25평 정도 되는 2층 점포는 임대료를 월 500만원에서 400만원으로 내렸는데도 장사가 잘 안돼 폐업한 뒤 2년째 공실”이라고 전했다.
경리단길과 삼청동의 몰락은 경기 위축에 최저임금 인상, 임대료 상승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무권리금을 내걸고 임차인을 구하는 점포는 부지기수지만 이런 가운데 임대료는 크게 떨어지지 않아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이주원·이수민·권혁준기자 jwoonmai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