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만 중시하는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학생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은숙(사진)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과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과정이 아닌 결과에 집착하는 문화를 꼽았다. 생각할 여유도, 실패로부터 배울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정답만 찍어내는 교육으로는 과학 인재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 과학자 가운데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정상욱 럿거스대 교수도 같은 의견이다. 정 교수는 “시대를 바꾸는 영웅은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탄생한다”고 말했다.오는 14~16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비스타 워커힐서울에서 ‘다시 기초과학이다:대한민국 혁신성장 플랫폼’을 주제로 열릴 ‘서울포럼 2019’에서는 재외한인 과학자들의 기초과학 인재 육성과 소통에 대한 뼈아픈 충고가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서울포럼 마지막 날인 16일 세션 2(‘칸막이를 허물어라-창의와 소통’)에서 강연과 패널 토론을 벌이는 서 교수와 정 교수는 기초과학이 혁신성장의 플랫폼이 되려면 ‘조바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이미 달성한 성과를 대우하고 업적을 기린다면 새로운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한국의 과학교육 시스템과 연구환경에 대해 귀중한 조언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본인의 논리를 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학생들이 각각의 의견을 자유롭게 발표하고 토론하면서 남들과 비교하고, 스스로 논리를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 교육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실패의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 된다. 서 교수는 ‘조기교육’ 열풍이 불고 있는 코딩을 예로 들었다. “잘못한 코딩에서 본인의 논리를 점검하고 여러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면서 배운다”며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과 논리 전개에 관심이 없는 교육은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포럼] 서은숙 “기초과학 경쟁력 키우려면 노력 평가 기준 재점검해야”
[재외한인 과학자들이 본 韓 기초과학]
서은숙·정상욱·찰스 리 특별강연
“인재 유출을 막고 한국 기초과학이 국제 경쟁력을 키우려면 노력에 대한 평가 기준을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체물리학 분야의 권위자로 해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서은숙 미국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는 1일 본지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국내 기초과학 연구 현주소에 대한 쓴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서 교수는 지난 1997년 11월 미국의 신진 우수연구자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한인 과학자로는 처음으로 받는 등 일찍부터 미국 과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2004년부터 미 항공우주국(NASA)과 공동으로 남극에서 검출기를 띄워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에너지인 우주선을 측정하는 크림(CREAM·Cosmic Ray Energetics And Mass) 프로젝트의 총괄책임자로도 활동하며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만들어냈다. 그는 ‘서울포럼 2019’ 마지막 날인 16일 세션 ‘칸막이를 허물어라-창의와 소통’에서 젊은 과학자들이 한국을 등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은 무엇인지, 창의력 육성 등과 관련해 한국 과학교육 시스템에서 보완돼야 할 지점은 무엇인지 귀중한 조언을 건넬 예정이다.
30여년 기초과학 연구 외길 인생을 걸어온 서 교수가 강조하는 대목은 ‘과정’과 ‘참을성’이다. 그는 “과학자는 기본적으로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고 문제 푸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며 “문제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이 곧 연구인데 설령 기대했던 결과가 쉽게 나오지 않아도 그 과정 자체에서 연구자가 실망·좌절이 아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연구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과학 교육 역시 ‘맞고 틀림’이 아닌 자신의 논리가 지닌 결함을 스스로 찾고 수정하는 과정 자체에 무게중심을 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지난해 고출력 레이저 핵심 기술 개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도나 스트리클런드 캐나다 워털루대 물리학 교수의 경우 대학원생 시절 낸 첫 논문에서 그 연구가 시작돼 꾸준히 한 우물을 판 결과 빛나는 성과를 얻게 됐다. 생애 첫 연구가 빛을 볼 수 있도록 ‘진득한’ 연구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 교수가 국내 우주선(宇宙線·cosmic ray)연구의 권위자인 박일흥 성균관대 물리학 교수를 천체물리학자로 변신시킨 일화는 과학계에서 유명하다. 언젠가 한국에 온 서 교수가 박 교수에게 “우주선을 검출할 실리콘 검출기를 한국에서 만들 수 있겠냐”고 물었고 박 교수는 “해본 적은 없으나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니 해보겠다”고 답했다. 우주에서 만들어져 지구로 오는 입자의 성분을 밝히는 검출기 1호는 지금도 박 교수의 실험실 벽에 걸려 있다.
기초과학 연구에 있어 ‘기다림의 미학’은 곧 양질의 인력이 나라 밖으로 유출되는 안타까운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2017년 스위스 국제개발연구원이 발표한 ‘세계인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인재 경쟁력지수는 100점 만점에 55.82점으로 63개국 중 39위에 머물렀다. 특히 ‘두뇌 유출’ 항목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3.57점으로 최하위권인 54위를 기록했다. 국내 우수 인재들이 외국 대학과 기업으로 떠나는 ‘두뇌 유출’ 현상이 매우 심각함을 드러내는 수치이다. 서 교수는 “유동성이 많은 세계화 시대에 한국 기초과학이 국제 경쟁력을 기르지 않으면 인재 유출현상은 막을 수 없다”며 “(여기서 말하는 경쟁력이란 결국)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과감히 투자하고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
△1971년 △고려대 물리학과 졸업 △1991년 루이지애나대 물리학 박사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 △1997년 미국 신진 우수연구원상 △2006년 NASA그룹 업적상 △2010년 미 물리학회 회원 △2017년 한미경제연구소 올해의 미주한인상
[서울포럼] 정상욱 “과학영웅 시스템 밖에서 탄생…엘리트교육 하되 조바심은 毒”
재외한인 과학자들이 본 韓 기초과학
정상욱 럿거스대 교수 인터뷰
미국서 더 유명한 강대원 박사 등
연륜 있는 인재 찾아내 대우해야
“우리가 찾는 과학계의 ‘영웅’은 예측 가능한 시스템 속에서 길러지기보다는 다양성과 창의성이라는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시대의 흐름을 바꾼 인물은 대부분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정상욱 럿거스대 교수는 본지와의 사전 e메일 인터뷰에서 이처럼 전망했다. 미국 UCLA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AT&T벨연구소를 거쳐 현재 럿거스대 양자재료합성센터·신소재연구센터 설립이사인 그는 우리나라의 포항공대, 중국 난징대 방문교수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선진국의 과학·인재 육성 시스템뿐만 아니라 무서운 속도로 선진국을 추격 중인 중국의 행보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높다. 정 교수는 서울포럼 2019 이틀째인 오는 16일 세션3에서 청중들과 만날 예정이다. ‘칸막이를 허물어라-창의와 소통’이 주제인 만큼 창의적인 인재 육성과 과학기술 발전 방안에 대한 통찰력을 나눌 것으로 기대된다.
그는 “과학 영웅을 만들고픈 조바심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뿐만 아니라 스카치테이프와 연필만 갖고 ‘그래핀’을 발견한 맨체스터대 연구진, 연구소 한편의 허름한 트레일러에서 ‘리눅스’ 운영체제(OS)를 개발한 리누스 토르발스가 그랬듯이 “영웅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훌륭한 과학자를 배출하려면 엘리트 교육이 필요하지만 그 시스템만으로 창조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며 “조바심을 내다 2000년대 초 벨연구소의 논문 조작 사건 같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벨연구소에 소속돼 있었던 얀 헨드리크 숀은 사이언스·네이처 등 저명한 학술지에 게재한 15편의 논문이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학계에서 퇴출됐다. 특히 숀 본인뿐만 아니라 연구소 내부적으로도 성과와 유명세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됐다. 연구 자금 유치에 목을 매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과학 인재가 언젠가는 탄생하리라 믿으며 마냥 기다려야만 할까. 정 교수는 “영웅을 만들 수는 없지만 이미 존재하는 영웅을 대접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촉발한 금속산화막 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MOSFET)를 처음 발견한 이가 바로 한국인 과학자인 강대원 박사다. 역시 벨연구소 출신인 강 박사는 이미 1992년 작고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에선 스튜어트 밸런틴 상을 수상하고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업적을 기리는 분위기다. 정 교수는 “우리에게 이미 있는 영웅들을 잘 찾아내 대우할 수 있을 때 다음 영웅이 찾아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 미국 등 선진국에 이어 새로운 ‘인재 블랙홀’로 떠오른 중국에 대응할 방안도 제시했다. 중국은 해외 고급 인력을 유치하기 위한 ‘천인계획’ 등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해왔다.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 비슷한 문화권이기 때문에 서양 선진국들보다 더 많은 인재가 중국으로 유출될 것이라는 게 학계·산업계의 공통적인 전망이다.
정 교수는 “잠재적 인재 블랙홀인 중국과 여전히 우리보다 앞선 일본 사이에서 한국은 과학계 허브의 역할이라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한중일 3국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국제 학술대회를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에서 지리적 이점 등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는 독일 알프스의 성을 개조해 학술 행사에 활용되는 슐로스 링베르크, 전원이 가득한 휴양지 같은 느낌을 주는 미국 애스펀센터 등을 예로 들며 “수려한 자연경관이 있는 제주도, 평화적인 올림픽 개최지로 각인된 평창 등에 국제 학술교류센터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특히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장소 자체의 의미와 이야기가 있는 장소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약력 △1957년 △서울대 수학과 졸업 △캘리포니아주립대 물리학 박사 △1989~2001년 AT&T 벨 연구소 연구원 △1997년 럿거스대 물리학과 교수 △2005 럿거스대 신물질 연구센터 이사 △2007년 호암상 수상 △2010년 제임스 C.맥그로디 신소재상
[서울포럼] 찰스 리 “생명과학 R&D, 사업화 연결 안되면 허상”
[재외한인 과학자들이 본 韓 기초과학]
서은숙·정상욱·찰스 리 특별강연
찰스 리 잭슨랩유전체의학연구소장은 서울포럼 2019 이틀째인 오는 16일 ‘사업화 없는 R&D는 허상이다’를 주제로 내건 세션2에서 생명과학 연구개발(R&D)과 바이오 산업 간의 연결고리를 강화할 방안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캐나다 앨버타대에서 의과학 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미국 하버드대 의대, 브리검 여성병원 교수를 거쳐 지난 2012년 잭슨랩 산하에 신설된 유전체의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됐다.
리 소장은 사이언스·네이처 등의 주요 학술지에 14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2004년 인간의 유전체에서 발생하는 ‘단위반복변이’라는 구조적 유전체 변이를 세계 최초로 규명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전까지는 같은 인간끼리 유전자가 99.9% 일치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96% 정도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인간 유전체 연구의 뛰어난 성과를 인정받아 암 연구 협회상, 호암 의학상 등을 수상했고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펠로로 활동 중이다. 2014년에는 톰슨 로이터가 뽑은 노벨 생리의학상 유력 후보로 이름을 알렸다. 리 교수는 이밖에도 미국인간유전학회(HUGO) 회장, 이화여대 석좌교수, 중국 시안교통대 부교수 등을 겸임하고 있다.
한편 잭슨랩은 1929년 설립된 세계 최대 동물 질병모델 연구소다. 2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방대한 연구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약 1,700명의 생명과학 연구자들이 매년 300만마리 이상의 동물 질병모델 생산과 개인별 맞춤 치료 연구를 통해 암·노화·당뇨·심장병 등에 관한 의학 기술을 개선해나가고 있다.
잭슨랩유전체의학연구소는 2012년 미국 코네티컷 주정부의 투자(약 1조원)를 받아 신설됐다. 2015년에는 이화여대와 공동 연구 등 교류를 시작, 이화여대 내에 이화-잭슨랩 암면역치료 연구센터가 설립되기도 했다.
△1969년 △1990년 앨버타대 유전학 학사, 의과학 박사 △2001년 하버드대 의대 교수 △2014년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펠로우 △2013년 잭슨랩 유전체의학연구소장 △2014년 톰슨로이터 노벨상 예측후보 △2015년 이화여대 방문교수 △2016년 미국인간유전학회(HUGO)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