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설문조사에 응한 경제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중장기 위협 요인으로 노동 등 구조개혁 지연을 꼽았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 노동개혁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고용악화와 투자부진 등 현 정부가 고전하고 있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 역시 노동정책에서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성패가 결국 노동정책을 어떻게 펴느냐에 달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거꾸로 보면 낙후한 노동시장 구조가 곳곳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 민주노총의 불참에다 한국노총의 반발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운영은 파행됐고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에 따른 보완책인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방안은 국회의 서랍 속에서 나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내외 경영여건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올해도 노동계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등의 이슈를 빌미로 ‘춘투(春鬪)’의 정치화를 예고했다. 익명의 한 경제전문가는 “친노동·반기업 정책이 경제 추락과 일자리참사를 초래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노동계 중심의 정책에서 전환해야 일자리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호소다.
‘한국 경제의 중장기 리스크 요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54%가 ‘노동 등 구조개혁 지연(이하 복수응답 가능)’을 꼽았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구조 변화(42%)’나 ‘재정건전성 악화(24%)’보다 많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저출산이 몰고 올 재앙 수준의 인구구조 변화보다 지지부진한 구조개혁이 한국 경제에 더 위협적이라고 본 것이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노동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전문가는 “노동정책에 대한 중기 로드맵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한국 경제를 압박하는 리스크는 곧 잠재성장률을 갉아먹는 요인이다. ‘잠재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보완이 가장 시급한 분야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70%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등 노동개혁’을 지목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밀어붙이며 노동시장을 더욱 경직시키는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일침이다. 정규직만이 선(善)이고 비정규직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을 깰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일부 방향성이 인정되더라도 과속에 따른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설문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과감한 투자 활성화와 노동개혁 실현은 (보수정부보다) 진보정부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정책 기조 방향을 과감하게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노동개혁 다음으로는 ‘산업 구조조정 및 신산업 육성(60%)’ ‘규제개혁(58%)’ ‘교육개혁(26%)’ ‘공공 부문 개혁(10%)’ ‘정치·선거제도 개편(6%)’이 뒤를 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고전하고 있는 일자리 문제와 투자 부진의 원인도 전문가들은 잘못된 노동정책에서 찾았다. ‘투자 부진의 가장 큰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50%가 ‘근로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노동정책’을 꼽았다. 올해 1·4분기 설비투자 부진(-10.8%)을 놓고 정부가 주된 요인으로 ‘대외 여건’을 꼽은 것과는 배치된다. ‘글로벌 경기 둔화’라는 답변은 40%였다. 전문가들은 대외 여건보다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과 최근 2년간 최저임금 29.1% 인상 같은 과격한 노동 일변도 정책이 기업 투자를 위축시켰다고 본 것이다.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늘리는 쪽으로 추진되다 보니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노동정책 외에 ‘자동차·반도체 등 주력 제조업 실적 부진(46%)’ ‘기업의 해외 현지 진출 확대(26%)’ ‘입지(수도권) 규제 등 악화하는 기업 환경(20%)’ ‘법인세 인상, 높은 상속세(14%)’도 투자 부진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설문에 참여한 한 응답자는 “기업 투자를 고려하지 않은 일자리 정책은 환자에게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않고 모르핀만 주사하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문 대통령이 취임 다음날 일자리상황판을 설치하고 국정의 최우선 순위로 일자리 창출을 제시했어도 가시적 성과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시급한 정책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도 가장 많은 72%가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를 꼽았다. 그다음으로는 ‘신산업 규제, 진입장벽 완화(66%)’ ‘인력 수요·공급 간 미스매치 해소(30%)’ ‘실업급여·직업훈련 등 고용정책 확대(18%)’ ‘창업지원(4%)’ 순이었다. 한 전문가는 “혁신성장과 노동시장 유연성 확보에 주력해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리고 안정된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정책 방향성을 제시했다.
자동차와 조선 등 주력 제조업 경쟁력 강화에 가장 필요한 정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76%가 ‘노동개혁’을 꼽았다. 32%는 ‘국가 주도의 산업발전 청사진 제시’를 지목했고 반대로 ‘없음(시장에 위임)’이라는 답변도 소수였지만 6%를 차지했다. ‘대출·보증 등 금융지원 확대’라고 답도 6%였다. /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