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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윤범모 관장 "40년전 百想선생 덕에 '그림글쟁이' 길로...한국미술사 바로 잡고 한류로 키워야죠"

<한국미술계 산증인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80년대초 근대작가 발굴 1년간 신문연재

'컬러지면+글' 독자들에게 폭발적 인기

저서 '한국현대미술 100년'으로 탄생

10여년간 오지여행...민중미술에도 눈떠

월북작가 등 연구하고 평양까지 답사

'서구 편향적' 한국작품 정체성 회복 위해

과천에 있는 상설전시장 서울관에 마련

K팝처럼 미술문화 국제화 전략도 세울것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권욱기자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권욱기자






조선은 ‘서화’의 시대였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이 ‘미술’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한국 근대미술의 역사를 인물 중심으로 정리해 글로 쓰고 책으로 엮은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훨씬 전부터, 우리 미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대중적인 글로 알린 이도 그였다. 북한의 초청을 받아 평양으로 미술답사를 다녀왔고 우리나라 최초의 북한미술 기획전을 열었다.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처음’ ‘최초’뿐만이 아니다.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의 지목을 받아 삼성미술관의 전신 격인 호암아트홀 전시장 개관을 준비하고 국립기관인 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을 맡아 전시의 포문을 연 것도 그였다. 지난 1980~1990년대 한국미술계의 중요한 현장을 빠지지 않고 지켰던 이 사람, 윤범모(68) 국립현대미술관장이다.


미술 바닥에서만 40년 이상 잔뼈가 굵은 그였으나 관장 선임 과정에서는 적잖은 잡음이 있었고 상당한 고초를 겪었다. 코드인사 의혹과 고위공무원 임명 역량평가에서의 봐주기 논란이었다. 2월1일 임명돼 취임 100일을 맞은 그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관장실에서 최근 만났다.

윤 관장은 “하루, 일주일이 어찌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가니 3개월이 3일 같다”고 취임 100일의 소감을 말했다. 자칭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인 그가 활짝 웃으니 하회탈처럼 친근한 얼굴이 된다. 그는 “미술관이 서울관·과천관·덕수궁관·청주관 등 4관 체제여서 업무량도 많고 끊임없는 회의의 연속이라 정작 자유롭게 전시 보러 다니는 행복을 반납한 셈”이라며 앓는 소리도 했다. 미술사학자, 행정가, 큐레이터, 작가 발굴자, 대안공간 설립자, 전시기획자로서의 지난 세월을 짚어보자고 제안하니 “과거는 부질없다. 업적은 지금부터 만들어갈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당찬 포부다.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가로 등단한 윤 관장은 ‘30대 초반 새파란 나이에’ 미술 관련 글쟁이로 입신양명했다. 잡지나 신문에 간헐적으로 평론을 기고하던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에 이름을 날리게 된 데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를 창간한 백상 장기영 사주의 결단이 영향을 미쳤다는 사연은 비화다.

“한국일보가 1980년대 초, 일간지로는 비교적 일찍 컬러 윤전기를 도입했죠. 장기영 사주께서 ‘컬러 윤전기로 일반 사진만 싣고 말겠느냐, 컬러 지면 편집의 효과를 극대화할 미술 연재물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시절 쟁쟁한 평론가인 이경성·이구열·유준상·오광수 등의 선배들은 한자를 섞은 문장이 익숙한 세대였죠. 반면 저는 어렸지만 ‘한글 1세대’로 신문 연재가 가능한 한글문장을 구사한다는 게 나름의 장점이었어요.”

그리하여 매주 토요일자 전면 기사로, 꼬박 1년간 한국의 잊힌 근대미술가를 발굴하고 소개했다. 요즘은 컴퓨터로 글을 쓰고 e메일로 주고받지만 당시는 인터넷은커녕 PC 보급도 드물던 때라 매주 윤 관장의 집으로 ‘한국일보 김 기자’가 미술 원고를 받으러 다녀갔는데, 그가 바로 소설가 김훈이었다. 연재 글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뜨거웠다. 신문사로 찾아오고, 편지를 보내고, 전화하는 이가 끊이지 않았다.

윤 관장은 “옛 화가들의 생애를 정리한 글만 봐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필자로 생각됐던 모양인데 너무 젊으니 ‘저 사람이 썼을 리 없다’고 하는 독자도 있었다”면서 “매주 연재하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불현듯 젊은 나이에 맞는 생생한 현대미술을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어 미국으로 도망치듯 가버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때의 연재물은 1984년 ‘한국현대미술 100년(현암사 펴냄)’으로 출간돼 한국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은 물론이고 ‘이혼 고백서’로 파란을 일으킨 나혜석을 다시 보게 했고, 역사가 잊은 작가 임군홍을 찾아냈다.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 같은, 근대와 현대 사이에 낀 작가들을 재조명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권욱기자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권욱기자


“거장의 일대기를 풀어내기 위해 원로작가나 작고한 작가의 유족을 만나면서 서양미술도 아니고 고미술도 아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근대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그렇게 자료가 모이고 쌓이다 보니 어느새 내가 근대미술사 전문가가 돼 있네요.”


우연이 인연과 필연을 낳기도 했다. 뉴욕의 펄떡이는 현대미술 속에서 살던 1988년, 한 일간지로부터 중국을 다녀와 현지 문화답사기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시절 ‘중공’은 입국도 쉽지 않았는데 운 좋게 보름짜리 체류비자가 현지에서 3개월로 연장됐다. 백두산에서 티베트까지의 중국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하고 사진집도 냈다. 윤 관장은 “타클라마칸사막과 고비사막을 지나 티베트를 누볐는데 중국 남서부 사막 끝에서 히말라야 만년설과 해발 수천m의 파미르고원을 지나 간다라 지역까지 향하는 일명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특히 좋아한다”면서 “동서교류의 길목이며 마르코 폴로와 현장 법사,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이 모두 그곳을 지나다녔던 곳이어서 문화·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기 때문”이라고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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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10년을 오지여행에 빠져 지냈다. 혼자 보기 아까워 미술가들과 함께 떠났다. “뜻있는 기업으로부터 억대의 기금을 받은 덕에 10여명의 작가와 함께 한 달씩 실크로드 미술기행을 떠날 수 있었어요. 그때 내가 인솔한 작가들이 (지금은 중요한 원로·중견작가로 성장한) 김정헌·임옥상·송장섭·황재형부터 강요배·오치균까지 다양했네요. 화가들에게 ‘인생을 바꿔줬다’는 얘기를 들었을 정도로 보람이 컸어요.”

모래바람을 맞으며 다니는 길 위에서 생각은 깊고 단단해졌다. “우리 미술이 너무 서구미술 일변도이고 미술 생태계가 사회적 기능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강해서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짚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미술과 함께한 그의 인생은 시류보다 두세 걸음 앞섰고 질곡의 역사였다. 사회참여형 미술인 ‘민중미술’의 대부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1979년 ‘현실과 발언’ 창립동인이기는 하나 심부름만 하던 막내인데 얼결에 대부 소리를 듣게 됐으니 (민중미술에) 빚진 셈”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자꾸 가다 보니 ‘미지의 세계’였던 북한미술에도 관심이 생겼다. 윤 관장은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조각을 도입한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복진(1901~1940) 연구자로서 현존 작품이 없는 줄 알았던 김복진의 유일한 국내 유작을 찾아냈다. 김복진의 동상 40여점은 일제 말기 군수품 조달을 위해 공출돼 녹아 없어진 터였다.

월북작가 등 북한 관련 미술가에 대한 연구로도 이어졌다. 윤 관장이 미국에서 찾아내 국내에 소개한 103세의 현존 최고령 화가 김병기는 평양 태생이며 북한에서도 활동한 바 있다. 1992년에는 남한 최초의 북한미술전 ‘그리운 산하’를 예술의전당에서 개최했다. 한 기업인이 북한으로 수출한 물건 값으로 현지 공예품과 미술품을 받아온 것을 정리해달라고 의뢰한 것이 풍경화 전시로 이어졌다. 북한미술 연구자 자격으로 평양 미술답사도 다녀왔다. 35년 전 한국 근현대미술 100년사를 정리했던 그가 이제는 잃어버린 분단의 역사를 남북한 미술사로 복구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후 지금까지 남한에서 열린 북한미술전이 100여건, 내 손으로 펼쳐 본 북한그림만도 1만점에 이르지만 작품의 진위, 품격, 반입반출 등의 문제가 상당합니다. 남북 문제는 정치상황과 직결되지만 남북 분단을 극복한 미술사적 정리는 시대적 소명이니까요. 개인이 할 수 없는 체계적·본격적인 남북 예술교류를 위해 국가기관이 연구·출판·전시의 공식 채널이 돼야 합니다.”

근대 화가들의 명예회복도 꿈꾼다. 윤 관장은 “대학 졸업전에서도 작품 값으로 200만~300만원을 부르는데 독립선언 33인 중 하나인 위창 오세창의 그림 한 점을 100만~200만원에 살 수 있는 게 우리 근대서화의 현실”이라며 “19~20세기 전반 ‘근대서화 시장’이 형성조차 되지 못한 채 몰락해 위대한 거장의 서화가 학생 작품만도 못하게 홀대하는 현실이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가까운 중국만 봐도 자국 역사에 대한 이 같은 푸대접은 없다. 그는 “중국의 근대화가 치바이스 혼자의 연간 작품 거래액이 4,000억원대로, 우리 미술 시장 전체 규모와 맞먹으니 안타깝다”며 “전통을 바탕으로 우리 미술을 체계적으로 조명했다면 오늘처럼 미술 시장이 위축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윤 관장은 “우리의 미술과 역사를 바로 세워야 외연을 넓힐 수 있기에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강조하려 한다”면서 미술계의 ‘서구 편향성’을 문제로 지적했다. 해결을 위한 첫걸음으로 과천관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미술 상설전시장을 서울관에도 둘 계획이다. 해외 미술계 관계자가 자연스레 방문하는 서울관에는 언제든 ‘이것이 한국미술이구나’를 알 수 있는 전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한류가 증명하듯 우리같이 자원 없는 나라에서는 머리와 재주를 팔아야 합니다. 방탄소년단(BTS) 같은 K팝과 대중문화가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른바 고급예술이라는 미술로도 이어지고, 경제교류에서 문화예술의 비중이 커져야 합니다. 미술가의 창작행위가 수익성을 우선해서는 안 되지만 결과적으로 경제효과와 연결되는 만큼 국익 차원으로의 미술문화 활성화를 위해 나서는 것도 미술관의 역할입니다. 그 체계적인 국제화 전략을 미술관이 맡겠습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He is…

△1951년 충남 천안 △1977년 동국대 미술학과 △1979년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1979~1982년 계간미술 기자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등단 △1984~1986년 호암갤러리 큐레이터 △1993~1999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1994~2016년 가천대 교수 △2007~2009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2008년 ‘시와 시학’ 신춘문예 등단 △2011~2015년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2012~2016년 고암미술문화재단 이사 △2014년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큐레이터 △2015년 박수근미술상 운영위원장 △2016년 한국민화센터 이사장 △2016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 △2018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2017년 김세중기념사업회 한국미술 저작출판상 △2017~2019년 동국대 석좌교수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장 △저서 ‘한국현대미술 100년’ ‘평양미술기행’ ‘한국근대미술’ ‘나혜석, 한국 근대사를 거닐다’ ‘한국미술론’ ‘백년을 그리다-김병기’, 시집 ‘노을 씨, 안녕’ 등 다수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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