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물의 도시' 베네치아...혼란의 시대를 예술로 위로하다

■막오른 베니스비엔날레

루고프 총감독 "가짜 판치는 세상

예술의 사회적 역할 필요한 때"

GP 철조망 활용 이불 '오바드V'

정은영·남화연·제인 진 카이젠 등

여성의 아픔 그린 韓작품들 주목

관람객으로 북적이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모습관람객으로 북적이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모습



‘흥미로운 시대를 살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

이탈리아 북부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이 축복 같은 문구가 뒤덮었다. 11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한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예술전을 이끄는 랄프 루고프(영국 헤이워드갤러리 디렉터) 총감독이 내세운 주제다. 1930년대 영국의 정치인 오스틴 체임벌린이 원나라 희곡작가 시혜(施惠)가 쓴 유규기(幽閨記)에 전하는 “태평스러운(寧) 개가 될지언정 세상을 혼란스럽게(亂)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성어를 자신의 연설문에 차용하며 한 말이다. 난세의 정치계를 비난하는 욕이나 다름없는 문구에 대응한 ‘흥미로운 시대를 살기를’은 혼란한 시대에도 예술이 흥미로운 소재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루고프 총감독은 “가짜뉴스와 왜곡된 사실이 판치는 어지러운 시대임에도 예술은 자신의 역할이 필요하며 그 역할로서 흥미로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고 “너무 어려운 논쟁을 던지는 전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예고는 현실이 됐다. 비엔날레 본전시 작가 수를 79명(팀)으로 현격히 줄인 루고프 총감독은 옛 조선소 자리인 아르세날레와 국가관들이 모여있는 정원인 자르디니에서 각각 작품을 선보이되, 자르디니에서 오밀조밀하게 보여준 작품을 아르세날레에서는 대형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랄프 루고프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랄프 루고프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


한국작가 이불은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의 철조망을 녹여 만든 작품 ‘오바드V’를 선보였다. 밤의 사랑 노래인 세레나데와 반대로 아침의 이별 노래인 ‘오바드’를 통해 이념 대립의 근대에 안녕을 고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느껴진다. 지난 1999년 이후 20년 만에 베니스비엔날레에 다시 초청된 이불은 국내 정치상황까지 작품에 투영했다. 아르세날레에는 철조망 600㎏을 녹여 만든 4m 높이의 대형작품을, 자르디니에는 그 미니어처 격인 소형작품을 내놓았다.

루고프 총감독이 직접 섭외한 것으로 알려진 강서경 작가가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추억과 이미지를 추상적인 선으로 구현한 ‘그랜드마더탑’이 자르디니에서 주목받았다면 아르세날레에는 한국 전통 가무의 움직임을 담은 무보(舞譜)를 모티브로 한 화문석 조각 작업으로 눈길을 끌었다.


한국계 작가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니카 이는 사각 평면작업을 앞뒤 양쪽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과 알주머니 같기도 하고 벌통 같기도 한 형태의 설치작품을 각각 내놓았다. 곰팡이와 박테리아, 고인 물의 썩어가는 상황 등 생물학을 예술에 끌어들이고 전기회로와 기계적 움직임까지 결합시키는 작가는 인간과 다른 생물, 나아가 기계와의 공존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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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오바드 V’이불 ‘오바드 V’


거대한 붓을 휘두르며 피처럼 붉은 물감을 천장 뚫린 사방 유리벽에 뿌려대다가 이내 흥건한 물감을 모으기를 반복하는 기계장치 ‘캔트 헬프 마이셀프’를 선보인 중국작가 순위엔과 펑유의 작품은 요란한 소리와 과격한 움직임으로 관객의 흥미를 자극한다. 커다란 철문이 180도로 움직이며 벽에 쾅쾅 부딪혀 부수기까지 하는 실파 굽타의 작품도 인기다. 태국작가 코라크릿 등 영상작품도 볼거리가 많다. 본전시의 첫인상을 두고 고루한 진열방식이라 “마치 아트페어 같다”는 평도 있으나 작품을 최소 2번 이상 만나게 된 관객의 효과적인 각인은 무시할 수 없다. 관람 피로도가 낮아졌고 대중성이 커진 것은 장점이나 비엔날레로서 미술관 기획전과의 차별점을 어떻게 찾을지는 숙제다.

본전시나 국가관 전시나 공통적으로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난민문제와 여성문제를 주목하고 있다.

김현진 큐레이터가 이끄는 한국관은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인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를 주제로 택했다. 정은영·남화연·제인 진 카이젠의 세 작가는 남성 위주의 역사가 소외시키고 망친 여성사를 보여주되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정은영은 1950년대를 전후해 남장 여자 배우가 출연해 큰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을 10년 이상 연구해 작품에 반영해 왔다. 이번 한국관 출품작은 트랜스젠더 음악가 키라라, 레즈비언 배우 이리, 중증장애인 배우 서지원, 남장 여성인 드랙킹 아장맨의 삶을 조명한 영상작품이다. 작가는 “이들 넷은 한국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살면서도 자신만의 영역을 일궈내면서 독창적인 미학을 만들어 냈다는 공통점이 있다”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늘 존재했던 이들”의 삶을 강조했다. 영상이지만 바닥부터 천장까지 아우르는 3채널 작품은 시각부터 청각까지 오감을 뒤흔든다. 빠른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관람객이 있을 정도다.

아니카 이 ‘바이올로가이징 더 머신(Biologizing the Machine)’아니카 이 ‘바이올로가이징 더 머신(Biologizing the Machine)’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 국가관 전경.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주제로 전시장 전체를 해변처럼 꾸며 오페라 형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리투아니아 국가관 전경.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주제로 전시장 전체를 해변처럼 꾸며 오페라 형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남화연은 논쟁적 무용가 최승희를 ‘반도의 무희’라는 작품으로 불러냈다. 식민과 제국주의, 분단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뒤엉킨 삶을 살았던 최승희를 그가 남긴 글을 토대로 꾸민 영상이다. 작가는 파편처럼 쪼개진 최승희의 흔적을 더듬어 그가 구현하려던 동양무용을 상상했고 특히 아름다운 영상미학이 돋보인다. 이 작품은 한국관의 유리벽 너머 아드리아해가 보이는 쪽에 설치됐다. 작가는 건물 바깥쪽에 작은 꽃밭을 만들어 “최승희가 상상했던 영토는 무엇이었을까”를 묻는다. 최승희의 육성곡 ‘이태리정원’이 30분마다 한 번씩 흐른다.

제인 진 카이젠은 제주 태생이나 덴마크에 입양된 자신의 개인사를 바탕에 깔고서 이를 한국 전통의 바리데기 설화와 오늘날의 여성문제로 확장해 보여준다. 설화 속 바리데기는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버려지지만,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부모를 구한 뒤 신이 된다. 영상작품 ‘이별의 공동체’는 강원도 철원지역에서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은 여성과 동두천 낙검자(성병 감염인) 수용소를 전전한 여성, 카자흐스탄 고려인 이주 여성 등의 이야기를 전한다. 작품은 제주 4·3사건 생존자이기도 한 무당의 퍼포먼스를 함께 보여주는 이 작품 속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바리”임을 이야기한다. 제인 진 카이젠은 “성차별 문제를 경계 문제로 해석했다”면서 “이는 전쟁과 국가주의, 이주 등 근대 사회의 선 긋기와 더불어 사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한국관은 김현진 예술감독의 큐레이터십이 확연히 돋보였다. 뿐만 아니라 목조 구조물 등을 설치해 관람 동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협소한 한국관의 공간적 한계를 탁월하게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비엔날레는 오는 11월24일까지 계속된다.
/글·사진(베니스)=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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