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세계최고 수준 상속세…오너들 세금 내느라 지분 줄줄이 매각

[상속세 리스크에 흔들리는 기업]

LG, 자회사 지분 팔고…OCI, 최대주주 지위 포기

중소기업은 지분 팔리지도 않아 회사 통째로 내놔

家業승계 아닌 사업지속인 企業승계로 인식 전환을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등 오너 일가가 그룹 지주회사격인 ㈜두산의 지분 약 70만주를 팔았다. 지난 3월 별세한 고(故) 박용곤 명예회장의 지분에 대한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지분에 대한 상속세를 내기 위해 구광모 LG 회장이 자회사 지분을 매각한 데 이어 재계 전반으로 ‘상속세 리스크’가 번지는 모양새다. 상속세가 지분·자회사 매각 등을 초래해 그룹 경영을 왜곡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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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박정원 회장과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 박혜원 두산매거진 부회장 등 고 박 명예회장의 자녀들은 시간 외 대량매매 방식으로 보유한 ㈜두산 지분 약 70만주를 매각했다. 이를 통해 약 650억~670억원의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4세 경영에 돌입한 두산그룹 오너들이 회사 지분을 매각한 것은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부친인 고 박 명예회장은 ㈜두산 보통주 28만9,165주(1.59%)와 우선주 1만2,543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재계에서는 이 주식에 대한 상속세가 약 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부동산 등 다른 상속재산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양지환 대신증권 연구원은 “만약 지분을 제외한 상속재산이 많지 않다면 지분매각 규모는 다소 과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주식담보대출 상환 등에도 쓰일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과도한 상속세가 상속을 위해 주식을 팔아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박정원 회장(133만7,013주), 박지원 회장(89만1,321주), 박혜원 부회장(44만4,693주)의 ㈜두산 주식을 합치면 약 267만주다. 매각한 70만주는 보유지분에 비하면 작은 규모가 아니다. 오너 일가 등 특수관계인들의 ㈜두산 보통주 지분율은 매각 전 51.08%에서 지분 매각 이후 47.24%로 바뀐다. 그룹 전체의 경영권은 여전히 안정적이지만 4세 경영의 선두주자격인 박정원·박지원 회장은 부친의 주식을 상속받는다고 해도 지분율이 줄어들 수 있다.


이 같은 사례는 두산그룹뿐이 아니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등 한진가 3세들도 상속세를 내기 위해 고 조양호 회장이 보유했던 지분 일부를 팔아야 한다. 조원태 회장이 한진그룹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고 조양호 회장이 보유했던 한진그룹 지주회사 한진칼의 지분 17.84%(약 3,500억원)를 상속받아야 해 상속세율 50%를 단순 적용해도 상속세는 1,700억원이 넘는다. 일단 상속인들은 고 조양호 회장에게 지급한 퇴직금 400억원을 상속세 재원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턱없이 모자라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고 조양호 회장의 한진 지분 6.87%를 매각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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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모 회장은 고 구본무 회장의 ㈜LG 주식 11.3% 중 8.8%를 상속받아 약 7,20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해 11월 연부연납 방식으로 6분의1 수준인 1차 상속세(약 1,536억원)를 우선 납부했다. 구광모 회장은 남은 상속세의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그룹 내 물류회사 판토스의 지분을 팔았다. 이태성 세아홀딩스 부사장도 급작스럽게 별세한 부친 고 이운형 회장의 세아제강 지분 관련 상속세를 물기 위해 세아제강 주식을 매각했다. 상속세 1,700억원을 완납했지만 지분율은 19.12%에서 4.2%로 줄었다. 이우현 OCI 부회장도 아버지 고 이수영 회장의 OCI 지분 10.92%에 대한 1,000억원대의 상속세를 내기 위해 보유지분을 매각하고 최대주주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재계에서는 이 같은 ‘상속세 리스크’가 그룹 경영을 왜곡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상속금액이 30억원을 넘으면 세율이 50%인데 최대주주 상속 지분에는 여기에다 20~30%의 할증이 붙는다. 이를 포함하면 상속세 최고세율은 65%까지 높아진다. “이는 가업 승계가 사실상 불가능한 세율(대한상공회의소)”이라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상속세가 합리적이었다면 팔지 않았을 자회사를 떨어내면서 경쟁력이 약해지고 지분율이 축소되며 경영권을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상속세를 내는 데 쓸 배당을 늘리면서 장기적인 투자 여력이 훼손되고 그룹의 자원이 특정 회사에 쏠리는 현상도 발생할 수 있다.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상속세를 내기 위해 지분을 팔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아우성이다. 대기업보다 주식거래세나 양도세 부담에 더 민감해 지분매각 같은 수단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소기업계의 한 관계자는 “블록딜도 인수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같이 중소·중견기업 업황이 좋지 않은 시기에 누가 지분을 사려고 하겠나”라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중소·중견기업은 물적분할이나 자산용도 변경 등을 통해 상속세를 줄이거나 아예 회사를 매물로 내놓기도 한다. 27일 중소기업중앙회는 ‘기업승계활성화위원회’를 출범시키며 ‘가업(家業) 승계’ 대신 ‘기업(企業) 승계’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 상속이 ‘오너 가문’이 아닌 ‘사업체의 지속성’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편 이날 한국경영자총협회 주최로 열린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상속세제 개선 토론회’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은 “상속은 단순세습이 아니라 경영권의 계속성을 위한 것”이라며 “상속 주식이나 부동산을 팔아야 상속세를 납부할 수 있다면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발제에 나선 이성봉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산업 경쟁국인) 일본과 독일·미국보다 우리나라의 상속세가 높다”고 분석했다. 실제 상속세를 내는 비율인 실효세율이 한국은 28.09%인데 일본은 12.95%, 독일은 21.58%, 미국은 23.86%로 나타났다. /박한신·구경우·심우일기자 hspark@sedaily.com

박한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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