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5월31일, 영국의 남아프리카 식민지 북부 도시 베리니깅.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오렌지자유국 연합이 평화조약을 맺었다. 보어전쟁은 45만 영국군이 7만여 보어(네덜란드 후손) 병력을 맞아 2년 8개월 만에 가까스로 이긴 전쟁이다. 영국은 승리했어도 깊은 내상을 입었다. 구한말 애국지사인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보어인들의 강한 저항에 감동한 영국은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더라’고 썼듯이 보어인들은 세계 최강 영국을 괴롭혔다. 아프리카 남단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의 후손인 보어인들의 게릴라 전법과 승마술·사격술에 연패하던 영국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게릴라의 근거지를 없앤다며 민간인 촌락을 불태우고 25만명의 여자와 아이들을 집중 수용소에 가뒀다.
명분 없는 전쟁에 보어군에 지원한 해외 의용군도 적지 않았다. 네덜란드인 2,000명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에서 모여든 4,175명이 무보수로 총을 들었다. 영국이 국제적 비난을 감수하며 전쟁에 나선 이유는 금. 보어인들을 해안에서 내륙으로, 산악으로 조금씩 내몰았던 영국은 두 보어 국가에서 잇따라 발견된 초대형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빼앗기 위해 체면을 던져버렸다. 인명 피해도 컸다. 영국군 2만2,092명이 전사하고 7만5,430명의 부상과 향수병으로 전력을 잃었다. 보어군은 6,189명이 죽고 2만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민간인 희생자는 더 많았다. 악명 높은 집중 수용소에서 보어인 부녀자 사망 2만6,370명을 포함해 4만6,500여명이 죽었다. 흑인 원주민들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양쪽에서 이용당하고 종전 후에는 더욱 심한 차별이 찾아왔다. 흑백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도 보어전쟁에서 싹텄다.
종군기자 겸 기병대 대위였던 윈스턴 처칠은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해 훈장을 받은 뒤 하원의원으로 뽑혔다. 마하트마 간디도 영국을 지원하는 인도 의료단의 일원으로 보어전쟁에 끼었다. 소집된 병사의 약 40%가 영양실조였다는 점에 충격받은 영국은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대규모 복지예산을 편성하고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올렸다. 힘이 이전 같지 못하다는 점을 자각한 영국은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과 영일 동맹을 맺었다. 영국이 힘겹게 조달한 전쟁비용(2억5,000만파운드·현재 원화 가치로 약 40조원)과 러일전쟁 지원금 등은 자금 압박을 낳고 1907년 세계공황으로 이어졌다. 자금이 궁해진 러시아는 단기채무를 남발해 스스로 무너졌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