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3위 자동차회사의 탄생을 예고했던 이탈리아·미국계 자동차제조사 피아트크라이슬러(FCA)와 프랑스 르노자동차 간 합병 추진이 백지화됐다. FCA가 르노차에 경영통합을 제안한 지 열흘 만이다. 외신들은 합병이 무산된 배경에는 FCA와 르노차뿐 아니라 르노 지분을 보유한 프랑스 정부, 르노·닛산·미쓰비시 연합의 주요 축인 닛산자동차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각자의 계산법으로 합병을 추진하려다 보니 합병주체들이 당초 원했던 밑그림이 크게 흔들렸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스 정부가 자국 노조는 물론 닛산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개입 강도를 높인 것이 협상 결렬의 결정적 요인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현지시간) FCA가 “독자적인 전략 실행을 바탕으로 책무를 이행할 것”이라며 르노와의 합병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FCA의 합병 철회 결정은 르노가 앞서 열린 이사회에서 6시간에 걸친 토론에도 불구하고 FCA의 합병 제안에 대한 결정을 연기하기로 한 직후에 나왔다. 르노가 합병에 뜸을 들이자 FCA가 제안을 곧바로 철회한 것이다.
외신들은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됐던 양사 합병 무산이 르노 노조의 강한 반대에 더해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의 체포 등으로 소원해진 닛산을 끌어안으려 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탓이라고 분석했다. 르노 지분 15%를 보유한 프랑스 정부가 합병 조건으로 FCA에 과도한 요구를 하고 나선데다 애초에 합병 상대가 아니었던 닛산의 입장까지 반영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FCA가 이대로 합병을 진행해도 큰 효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FCA는 합병 제안 철회를 공식화하면서 프랑스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FCA는 성명에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이 성공적 합병 추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해졌다”며 합병 철회 책임이 프랑스 정부에 있음을 시사했다.
프랑스 정부는 당초 구매비용 절감과 자율주행·전기차 등 첨단 분야의 개발비 분담 등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양사 합병에 지지를 보냈지만 르노 노조가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며 반발하자 합병 후 공장 내 일자리 보전 등의 조건을 내걸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최고경영책임자(CEO)에 르노 출신을 선임하고 프랑스에 본사를 둬야 한다는 요구 등도 덧붙였다.
르노얼라이언스의 주축인 닛산차를 끌어들이려 한 프랑스 정부의 입장 때문에 합병 논의가 더디게 진행된 점도 무산의 원인으로 꼽힌다.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르노 이사회의 합병 결정 연기는 프랑스 정부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한 이사회 관계자는 “프랑스 정부에서 닛산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며 1주일간의 합병 결정 연기를 요청했다”고 전했다. 앞서 인터뷰를 통해 “FCA와의 합병에서 첫째 조건은 닛산의 지지”라고 주장했던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정경제장관은 다음주 초 일본을 방문해 닛산을 설득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닛산은 합병에 대한 반대 의사를 내놓지 않았지만 르노와 달리 FCA와의 통합에 큰 시너지 효과가 없다고 보고 이번 합병에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닛산은 FCA와의 자산 및 기술 공유에 큰 이점이 없고 주 수익원인 북미 시장에서 FCA와 경쟁 관계인 점, 새 합병회사에 대한 출자 비율이 현재 닛산이 가진 르노 지분의 절반(7.5%)으로 떨어지는 점 때문에 합병을 주저하는 입장이었다”고 설명했다.
FCA는 앞서 지난달 27일 르노에 각각 50%의 지분을 소유하는 합병을 제안하고 협상을 벌여왔다. 350억달러(약 41조2,300억원) 규모의 양사 합병은 독일 폭스바겐, 일본 도요타에 이어 연간 생산대수 870만대 규모의 세계 3위 자동차 회사 탄생을 예고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