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1년 6월7일 오후3시55분, 이스라엘의 에치온 공군기지. 전투기 14대가 차례로 솟아올랐다. 목표는 800여㎞ 떨어진 이라크 바그다드 남부의 오시라크 핵 연구단지. 프랑스의 기술 지원으로 건설되고 있는 원자로였다. 이스라엘은 오시라크 연구단지에서 핵무기가 개발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선제 폭격을 감행했다. 아랍 각국의 방공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민항 노선으로 우회하거나 해발 30m까지 초저공으로 날아 목표에 근접한 시각이 오후6시35분. 공격을 맡은 F-16A 8대는 급상승 후 급강하하면서 폭탄을 떨어뜨렸다. 공격기들은 호위를 맡았던 F-15A 전투기와 합류해 전속력으로 내뺐다. 해 질 무렵 모든 기체가 돌아왔다.
반면 오시라크 단지는 불벼락을 맞았다. 이스라엘은 유도 미사일이나 스마트 폭탄이 아니라 재래식 MK-84 무유도 폭탄으로 단지 내 중요 시설을 부쉈다. 이라크 병사 10명과 프랑스 민간 기술진 1명이 이때 목숨을 잃었다. 이라크에도 기회는 없지 않았다. 이스라엘 전투기의 초저공 비행을 요트에서 직접 목격한 요르단 국왕은 공습을 직감하고 이라크에 전화 연결을 시도했으나 통신 인프라가 취약해 전달하지 못했다. 오시라크 기지의 레이더 담당 장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가며 레이더 사이트를 꺼버린 점도 패인으로 꼽힌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관련자들에게 엄중한 벌을 내렸다. 반대로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화려하게 조명받았다. 조종사 중에서 군 최고위 장성이 배출되고 막내 조종사는 이스라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화제를 모았으나 2003년 미국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국제 사회는 이스라엘의 공습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며 각종 제재안을 들고 나왔다. 8차례 결의안을 낸 유엔에서 가장 반발한 나라는 프랑스. 앵글로색슨 국가인 영국과 미국이 프랑스의 중동 석유 이권을 훔쳤다고 생각해 이스라엘 규탄에 앞장섰다. 유엔은 재발 금지 약속과 배상금 지급도 결의했으나 이스라엘은 프랑스 유족에게만 보상금을 내줬을 뿐이다. 오히려 이듬해에는 시리아가 의심된다며 시리아의 핵 연구시설까지 폭격해버렸다. 미국은 고비 때마다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오시라크 연구단지도 1990년 걸프전에서 미국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됐다. 연이어 주변국의 핵 개발을 사전에 잘라낸 이스라엘은 최근 이란과 긴장 상태다. 이스라엘의 선제 공습이 마냥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다. 미국이 가진 대북 군사 옵션의 유력한 카드가 이스라엘식 공습이기 때문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