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을 대비하기

작가

내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위험을 겪어낼 힘 비축 위한 것

지독한 외로움·공포감 느낄 때

책 속 이야기 힘 통해 위로 받아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페루의 대문호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을 읽다가 오랫동안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장면을 발견했다. 남자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마른강 전투였지. 거기서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거든.’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관동대지진 때였지. 거기서 자개 가게 처마 밑으로 도망가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했다네.’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낮잠 잘 때 일어났어.’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가장 고독했던 시절이었지.’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페루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어.’ 남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때를 떠올리며 감상에 젖는다. ‘과거’에서 자신의 용감했던 모습, 간신히 위험을 피했던 모습을 회상하며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한 공포로 다시금 몸을 떤다. 마치 무용담을 털어놓으며 은근히 기분 좋은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들처럼. 그러자 마지막 사내는 이렇게 멋진 찬물을 끼얹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아직 안 왔어.’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위험천만한 상황을 수없이 겪었어도, 가장 위험한 상황은 아직 안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가장 위험한 순간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숙의 징표가 아닐까. 위험을 겪으며 삶의 면역력을 키우는 성장통은 사춘기뿐 아니라 평생 지속되는 아픔이다. 사춘기를 지나서도 언제나 겪어야 할 내면의 성장통을 잘 이겨내는 사람들은, 삶에 늘 위험이 잠복해 있음을 깨닫고 매순간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 안다. 나는 최근에 내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가 바로 그 ‘언젠가 닥쳐올 더 큰 위험’에 대비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더 커다란 위험’에 대비하는 마음챙김의 비법, 그것이 바로 책을 읽고, 시를 낭송하고, 소설을 이해하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올지도 모를,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 위험한 상황을 위해. 우리가 저마다 겪어야 할 가장 위험한 순간을 온몸으로 겪어낼 힘을 비축하기 위해 나는 지금 문학작품을 읽는다.


문학은 나를 아름다운 조바심의 세계로 초대한다. 기대하던 신간들이 쏟아져나올 때면, 마음이 다급해진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으면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생의 아름다움이 있을까봐 조바심을 내게 된다. 내가 지금 이 시집을 읽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것들, 내가 지금 이 소설을 읽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나를 무심코 재빠르게 스쳐 지나갈까봐, 즐거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읽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담담하게 바라볼 줄 알고,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바라볼 수 있는 공감능력을 키우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유대감이 싹튼다. 빈센트 반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에 대해 쓴 내 책을 보고 어떤 독자가 이런 리뷰를 남겨 놓았다. 너무도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빈센트의 곁으로 가서, 그냥 하루종일 아무 말없이 빈센트의 곁에 있어 주고 싶다고. 이런 독자들의 따스한 리뷰를 만날 때면,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미처 다 쓰지 못한 부분, 행간의 여백에 남겨둔 메시지까지 읽어내는 독자들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소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순간이 바로 문학적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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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들 때마다 내 안에서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그때 무슨 일이 있든, 나는 지독한 외로움과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 내 곁에 아무도 없을지라도, 나는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의 힘을 통해 위로받을 것이다. 무인도에 홀로 남겨져 책 한 권 없는 상황에 처할 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의 기억이 반짝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소중한 책들의 숲을 헤매며 내 마음을 다독인다. 그 무엇도 내 마음속에서 둥지를 튼 소중한 문학작품들의 감동을 빼앗아갈 수 없도록. 시집이나 소설책이 곁에 없는 순간에도, 우리가 뜨겁게 체험할 수 있는, 이토록 눈부신 문학적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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