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이사람]이형목 천문연구원장 "세계 천문학 한류바람 거센데...정작 국내서는 저평가 됐죠"

美·러도 한국망원경 기술 도입 요청

'KVN스타일' 신조어까지 생겼지만

공직자들 국내 연구진 수준 낮춰봐

古典 속 천문관측 내용 빅데이터화

비뚤어진 천문학 인식 바로잡을 것

이형목 한국천문연구원장./대전=권욱기자이형목 한국천문연구원장./대전=권욱기자



인간은 얼마나 멀리, 얼마나 오래전까지 볼 수 있을까. 과학계는 약 138억년 전 발생한 태초의 빛을 포착했고 우주의 끝단인 약 465억광년(우주 반지름)에 이르는 시공간을 추적하고 있다. 특히 시공간을 변화시키는 중력 탐구에 가속이 붙고 있다. 그 최전선에 자랑스러운 한국인 석학이 있다. 이형목(사진) 한국천문연구원장이다.

이 원장은 한국의 중력파 연구에 시동을 건 인물이다. 천체과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라이고 프로젝트에서 한국 연구진을 이끌며 중력파 발견에 기여했다. 지난해 원장으로 취임한 후에는 전임자의 유업을 이어받아 사상 첫 실제 블랙홀 촬영 국제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내 연구진의 활동을 지원해 성과를 냈다. 최근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의 달 탐사 프로젝트에 실릴 탑재체를 공동개발하기로 협약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이제 중력파 발견에 공헌한 한국의 첨단 네트워크형 전파망원경인 ‘한국우주전파관측망(KVN)’ 기술의 세계화에 나서고 있다.


7일 대전 대덕구 본원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가진 이 원장은 “우리나라가 독자 구축한 KVN은 이번에 국제 과학계가 블랙홀을 최초로 촬영하는 데 사용한 장비(초장기선 전파간섭계 망원경·VLBI)의 축소형이어서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파장의 빛을 관측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미국·러시아 등에서 KVN 기술에 주목하고 도입하겠다고 요청이 와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세계 음악계에서) 마치 ‘강남스타일’이 유행했던 것처럼 국제 천문학계에서 ‘KVN스타일’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로 천문학의 한류가 일어나고 있다”며 “유럽에서도 이탈리아가 KVN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으로 한국 천문학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저평가되고 있다. 이 원장은 “아직도 국내 공직자들 중에서는 한국의 천문과학 역량을 후진국 수준으로 낮춰보고 ‘당신들이 무슨 성과를 냈느냐’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우리 천문학 연구진의 수준은 이제 후진국에 비교될 것이 아니라 미국·일본에 견주어 상당 부분 그들을 추격했을 정도로 향상됐다”고 강조했다.

이형목 한국천문연구원장./대전=권욱기자이형목 한국천문연구원장./대전=권욱기자




이 원장은 한국 천문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고 국민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작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그는 “조선 시대에는 우리의 천문학 지식이 명나라보다 앞서 있었고 세계적인 수준이었다”며 “당시 국제 교류로 서양 학문을 적극 받아들인 결과”라고 전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국보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꼽았다. 이 천문도는 고구려 시절 평양성에 있던 우리의 고대 천문도가 전란에 유실되자 그 복사본을 바탕으로 조선 태조가 지시해 거대한 비석에 새겨 만들어졌다. 이 원장은 대덕 본원 로비에 전시돼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복원본 앞으로 취재진을 안내한 뒤 “여기에 그려진 별이 거의 1,400개에 이르는데 그중 200개 정도는 오늘날 존재가 정확히 확인됐을 정도로 정밀한 기록”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지구의 자전축은 약 2만6,000년 주기로 변하기 때문에 북극을 기준으로 한 별들의 상대적 위치는 미세하게 변한다”며 “이를 감안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 위치를 현재의 관측 기록과 비교해 일부 별들의 위치 오차를 역계산해보면 약 2,000년 전의 별 관측 기록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 시절 우리 조상들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별 관측 기록을 낸 한나라와의 문물 교류로 고대부터 선진적인 천문 관측 기록을 확보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천문 역사가 이처럼 유구함에도 오늘날 내부적으로 저평가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 원장은 일제의 영향을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일본 학자들은 우리 조상들을 쇄국으로 후진화한 민족이라고 폄훼했지만 실제로는 고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국제 학문 교류가 활발해 천문 등 기초 분야의 역량이 세계적이었다”고 전했다. 또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기간에 제대로 된 자연과학 교육을 하지 않아 우리 천문과학의 명맥이 수십 년간 끊기게 됐다”고 지적했다. 천문학을 비롯한 한국의 기초과학을 스스로 비하하는 우리의 의식에는 일제의 식민사관 잔재가 남아 있다고 반추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 원장은 ‘천문 한류’의 역사와 현재를 재발견·재평가하는 차원에서 최근 이색 사업에 시동을 걸었다. 승정원일기·조선왕조실록 같은 우리 고전에서 천문 관측과 관련된 내용을 한글로 번역해 빅데이터화하는 작업이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술이 적용돼 해당 서비스를 개발하기로 했는데 오는 2020년부터 개방돼 일반 국민 누구나 스마트폰이나 개인용컴퓨터(PC)로 접속해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원장은 “그동안 한글로 번역돼 나온 천문 기록은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은 것들인데 그 원본 기록에 해당하는 승정원일기는 훨씬 내용이 방대해 한글로 번역된 분량이 이제 겨우 절반에 그친 상황”이라며 “그 속에 굉장히 중요한 천문 데이터가 많이 숨어 있어 해독해보자는 차원에서 고전번역원과 함께 이번 사업을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 원장이 천문 한류 재발견에 나서는 이면에는 ‘시민과학(시티즌사이언스)’의 확산을 바라는 열망이 있다. 근대부터 서구에서 기초과학이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젠틀맨’으로 대표되는 교양 있는 일반 지식인들이 아마추어 과학도로 뛰어들어 과학에 대한 국가적·국민적 관심과 역량을 높였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천문 데이터 같은 과학정보는 더 이상 전문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며 “그런 정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얻어지지만 일반인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데 온라인으로 국민에게 개방하고 쉽게 데이터를 가공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도구를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시절 별보며 천문학도 꿈 키워



韓연구진 이끌고 중력파 발견 기여

NASA와 달탐사 탑재체 공동개발




이 원장은 천문학자가 된 것에 대해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되짚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그를 천문학도의 길로 이끌었다. 1956년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 살던 동네는 전기 공급조차 잘 되지 않던 시골 동네였던지라 밤이면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을 보며 자랐다. 그렇게 천체에 대한 관심을 키우다 자연스럽게 대학 진학 당시 천문학도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그는 “대학 진학 무렵 의사니 법률가니 생각도 할 법 했지만 저는 천문학 외에 다른 길은 아예 고민도 안 해봤다”며 “당시 공과대 지원 붐이 일었지만 저는 1~3지망 모두 (천문학도가 되기 위해) 자연계열로 지원했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서울대에서 수학하고 군역을 마친 후 유학을 고민하던 그에게 동문수학하던 친우가 마침 미국에서 우편으로 받아놓고 쓰지 않던 3개의 미국 대학 지원서를 넘겼다. 그렇게 또다시 운명처럼 미국행을 택한 그는 3개 대학 중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이후 캐나다 이론천체물리연구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부산대에 교수 자리가 나 귀국하게 됐다. 10여년간 부산대에서 교편을 잡은 뒤 서울대로 옮겼고 지난해 천문연 수장에 올랐다.

궁금증 투성이 우주 실체 파헤치려

국제협력 통한 연구 갈수록 활성화

한국도 글로벌 프로젝트 참여해야



이 원장은 천문학에 대해 “우주는 어디에서 시작됐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는 학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천문학은 이미 상당히 숙제를 끝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우주가 약 138억년 됐으며 우주의 크기도 알아냈고 빅뱅에서 시작해 우주가 가속팽창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실체적 발견을 상당히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문학은 할 일을 다 끝낸 것일까.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이 원장은 “천문학의 근원적 질문은 과거와 지금이 다르지 않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문제에서는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됐는지, 가속팽창한다면 메커니즘은 어떻게 되는지, 생명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과학계가 아직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구체적인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점점 더 대규모의 투자가 필요한 거대한 망원경 등이 필요하게 될 터인데 어느 나라도 홀로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점점 더 국제 협력과 교류를 통한 연구가 활성화할 것이라며 우리 역시 이 같은 조류에 적극 동참해 글로벌 연구 프로젝트에 과감히 도전할 것을 독려했다. /대전=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사진=권욱 기자

민병권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