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 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에 핏줄기 있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잔뜩 낀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에서 ‘광야에서’의 노랫말이 울려 퍼졌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우리가 민주주의입니다’라는 적힌 손팻말을 든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였다.
행정안전부가 주최하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제32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인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진영 행안부 장관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와 민주화운동 관계자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시회, 합창, 공연이 어우러진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됐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기념식이 옛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에서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해당 부지를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해 시민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게 계기였다. 기념사업회 측은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는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난 비극의 현장”이라며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식 장소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서지현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와 박창진 대한항공직원연대 지부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기념식은 독립유공자 후손과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사자, 남영동 고문 피해자 등이 참여한 애국가 제창, 경과 보고 영상 상영, 진 장관이 대독한 대통령 기념사, 가수 장필순씨 축하공연, 시민들이 발언하는 ‘2019 국민의 소리-우리가 민주주의입니다’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국민의 소리 순서에서는 각계 시민들이 연단에 올라 민주주의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밝혔다. 지선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일제 강점기, 전쟁, 군사독재, 경제위기 속에서도 지난 100년 동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며 “이제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고(故)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도 “다시는 제2·3의 용균이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산업재해를 막을 수 있는 법 제도를 제대로 만들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외에도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활동가,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 이은아 전국 특성화고 졸업생 노동조합 위원장 등 7명이 발언을 이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진 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기념식을 하게 돼 마음이 숙연해진다”며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권유린과 죽음의 공간이었지만 32년 만에 우리는 이곳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꿔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며 “민주주의와 인권이 민주인권기념관의 기초라면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기구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밭에 내리쬐는 햇볕”이라고 민주시민교육 기관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자인 서 검사는 이날 행사가 끝난 뒤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기념식을 여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며 “뜻깊은 행사에 참여하게 돼 과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많은 분들의 피와 희생으로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뤄냈지만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덧붙였다. 박 지부장도 “지난해 31주년 기념식에서 서 검사와 처음 만났다”며 “행사 진행이 뜻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현실을 느껴 묘한 감정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이날 부산, 원주, 대전 등 20개 지역에서도 6·10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문화제와 강연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