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출판업자였던 주제프 마리아 보카베야는 가난한 신자들의 신앙 단체를 위한 성당 건축을 구상한다. 보카베야는 자신의 교구 소속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델 비야르에게 건축 설계를 맡겼다. 1882년 첫 삽을 뜨기 시작한 성당은 기둥을 세우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힌다. 기둥을 대리석 조각으로만 만들고 싶어 했던 설계자 비야르와 회반죽을 섞어 만들기를 원했던 보카베야의 이견 탓이다.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건축가 비야르가 사임한다. 보카베야가 선택한 새로운 건축가는 비야르의 제자였던 31세의 안토니 가우디였다.
1852년 스페인 구리세공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17세 때 건축 공부를 시작했고 30대 초반 후원자인 직물업계 거부 에우세비오 구엘을 만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의 성격은 괴팍한 편에 가까웠지만 건축 설계 능력은 탁월했다. 그가 비야르를 대신해 맡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성 가족성당)은 평생의 역작이다. 가우디가 성당 건축 책임을 맡을 당시 10여년이면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구상은 점점 커졌고 결국 완성된 성당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바르셀로나의 상징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이 지난 7일 뒤늦게 시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았다. 1885년 가우디가 새 설계안을 시에 제출했지만 시 의회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건축허가 없는 모호한 상태로 계속 공사가 이뤄졌고 바르셀로나시가 2015년부터 무허가 건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협상에 나섰다. 결국 시와 성당 측은 460만유로(약 62억원)의 수수료에 합의하고 건축 허가를 마무리했다.
비야르와 보카베야의 갈등이 없었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평범한 건축물에 그쳤을지 모른다. 가우디는 30세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참여한 후 74세로 타계한 1926년까지 40년을 성당 건설에 헌신했다. 성당은 그의 사후 100주년인 2026년에야 완공될 예정이다. 살아생전 가우디는 “나의 건축주인 신께서는 결코 서두르지 않으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속도 경쟁에 매달리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그의 따끔한 질책이다. /홍병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