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의약품 시장의 주류가 당장 생명을 연장하는 항암제 등에서 삶의 질을 보장하는 만성질환 치료제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질병을 치료하는 진단의학에서 평소에 건강한 삶을 유지시키는 예방의학으로 기술의 방향이 변하는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막을 내린 ‘2019 바이오 인터내셔널(바이오 USA)’에 참가한 글로벌 제약사들은 만성질환을 차세대 의약품 시장의 핵심 분야로 꼽았다. 올해로 26회를 맞은 바이오 USA는 전 세계 67개국 7,000여개 바이오제약기업이 참석하는 바이오제약 분야 최대 전시회다.
행사를 주최한 미국생명공학협회는 18개의 주제 중 올해 만성질환과 환자복지를 주요 세션으로 정했다. 기존 유전자가위, 유전자 치료제, 면역항암제 등으로 첨단 의약품 위주로 강연이 진행됐던 것과 사뭇 달라졌다. 행사 기간 미국 의약품 연구개발 정책을 전담하는 국립보건원(NIH)은 만성질환 치료를 위한 유전체(게놈) 연구에 앞으로 5년 동안 4,200만달러(약 495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만성질환은 당장 생명에 직접적인 지장을 주지 않지만 방치하거나 제때 치료하지 않을 경우 삶의 질이 급격히 저하되거나 다른 합병증을 유발하는 질병을 일컫는다. 꾸준하게 치료를 받고 치료제를 복용하면 관리가 가능한 우울증, 당뇨병, 고혈압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만성질환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고령화와 스트레스, 생활습관이 거론될 뿐 뚜렷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획기적인 치료제가 없고 완치가 어렵다는 점도 만성질환에 글로벌 제약사들이 주목하는 이유다. 평생 치료제를 복용해야 하는 탓에 제약사 입장에서 꾸준하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아스트라제네카의 당뇨병 치료제 ‘큐턴메드’, 암젠의 골다공증 치료제 ‘이브니티’, 젤레시스의 체중관리제 ‘플레니티’ 등 만성치료제의 판매를 잇따라 승인했다.
선진국을 위주로 한 급격한 고령화로 만성질환 치료제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65세 이상 노인 중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비중은 80%에 육박했다. 시장조사업체 시온마켓리서치는 지난해 39억2,000만달러 규모였던 글로벌 만성질환 치료제 시장이 연평균 17.5% 성장해 오는 2024년 10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국내 기업들의 만성질환 치료제 개발도 활발하다. 한미약품은 최근 자체 플랫폼 기술 ‘랩스커버리’를 적용한 비만 치료제 ‘랩스글루카곤 아날로그’의 전임상 시험 결과를 미국 당뇨병학회에서 발표했다. JW중외제약은 통풍 치료제 ‘URC102’의 임상 2상을 진행 중이고 GC녹십자도 만성 B형간염 치료제 ‘GC1102’의 임상 2상에 돌입했다.
한국바이오협회 관계자는 “평균 수명이 짧았던 과거에는 병에 걸리더라도 오래 사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며 “수많은 만성질환 치료제가 등장했지만 아직 획기적인 치료제 없기에 앞으로 관련 시장은 글로벌 바이오제약기업의 격전지로 부상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