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시찰하고 온 통신사의 정사(正使)와 달리 부사(副使)인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의 주장이 수용돼 조선은 잠시 태평했지만 결국 7년 동안 전란에 시달렸다. 6·25전쟁 직전 신성모 국방장관은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라면서 국민을 안심시켰지만 이후 3년 동안 온 산하는 피로 물들었다. 잠시 안도하고자 국방을 위한 노력과 비용을 아낀 대가다.
지난 2018년 4월 판문점선언에서 북한의 비핵화가 합의된 후 한국에는 안도와 국방소홀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전쟁은 없다”면서 핵 대비 태세를 늦추고 군대를 감축하며 병사들의 봉급 인상과 민주적인 병영생활 개선에 예산을 우선 할당하고 있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면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나 ‘만전지계(萬全之計)’는 회피하고 있다. 5월 초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 고체연료와 유도기술 개량의 의도로 우려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국방장관은 대화의 제스처로 해석하면서 국민을 안심시키고 있다. 임진왜란이나 6·25전쟁 직전의 경우와 크게 다른가.
군사에서 대비태세를 논할 때 적의 ‘의도’는 고려하지 않는다. 의도 추정이 정확할 수 없고 정확하다고 해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이 보유하고 있는 능력을 기준으로 대비태세를 강화한다. 적이 특전부대나 도하장비를 모으면 의도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적의 침투나 도하에 대비한다.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 한국은 그 핵무기의 사용 가능성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북한이 체제유지의 의도로 핵무기를 개발했다면서 태평하며 핵 공격 가능성은 고려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핵 위협과 한국의 대비태세 간의 격차는 점점 심각해지는 것이다.
북한은 1950년 6월 남한을 무력으로 통일시키고자 전쟁을 일으켰고 현재도 휴전상태다. 2월 하노이회담의 결렬로 드러났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7년 8월 서해에서 상륙훈련을 지도하면서 “서울을 단숨에 타고 앉으며 남반부를 평정”할 것을 요구했고 ‘7일 전쟁’계획을 만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전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허버트 레이먼드 맥매스터 장군은 5월5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한미동맹을 파괴한 후 무력통일을 달성하고자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핵 대비 태세를 격상시키지 않는 것은 정부와 군대의 직무유기다.
69년 전 이달에도 한국은 북한의 공격 가능성을 무시하다가 완벽한 기습을 당해 2일 만에 정부가 피난하고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으며, 한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방어선으로 쫓겨났다. 6·25전쟁을 상기한다면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 기습을 방지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북한이 핵무기 사용으로 위협하면서 백령도를 점령하거나 지뢰가 제거되고 12m 폭의 도로로 연결된 철원지역으로 북한의 대규모 병력이 기습 공격해 서울을 점령 또는 포위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의해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와 군대는 ‘남북한 군사합의’로 전방지역 정찰이 불가능해도 대규모 한미연합연습이 모두 폐지돼도, 정예사단들을 계속 감축하면서도 안심하라고 말한다. 6·25전쟁의 재연을 걱정할 만하지 않는가.
한국은 주요20개국(G20) 국가에 속할 정도의 경제대국이 됐다. 지킬 것이 많아졌지만 추가투자를 위한 여력도 갖게 됐다. 당장 무사안일에 탐닉하기보다 미래의 유비무환과 만전지계에 더욱 투자해 이 번영을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비핵화를 위해 외교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핵무기 위협하에서의 기습남침할 가능성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한미연합사령관을 한국군 대장으로 교체하는 일을 잠시 연기한 채 미국의 핵우산과 증원전력이 확실히 제공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민 또한 안일에서 깨어나 정부와 군에 철저한 대비를 요구해야 한다. 6·25전쟁의 분명한 교훈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대비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