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넘게 이어지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지만 ‘기업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며 최소한의 대응 가이드라인도 내놓지 못하는 한국과 달리 세계 주요국들은 미중 양국의 압박 속에서 발 빠르게 입장을 정리하고 대책 수립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경우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화웨이 배제’ 주문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그에 따른 기업들의 대응도 손쉬워진 측면이 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지난해 각 부처와 자위대 등의 정보통신기기에서 화웨이 제품 사용을 사실상 배제한 상태다. KDDI 등 일본 주요 통신 업체들이 화웨이폰 판매를 중단하고 소프트뱅크가 5세대(5G) 네트워크 구축 협력사로 화웨이 대신 노키아와 에릭손을 선정한 것은 화웨이 사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확실한 노선 정리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된다. 호주 역시 비슷한 시점에 통신 부문에서 안보를 이유로 화웨이 장비 사용을 대거 제한했으며 뉴질랜드도 이통사의 화웨이 장비 사용을 금지했다.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입장을 분명히 해준 것이다.
프랑스·독일의 경우 전면 배제는 아니라는 입장으로, 인가 조건 등 보안규정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영국도 이동통신장비 핵심부품에서만 제한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화웨이 장비를 전면 배제하면 5G 네트워크 도입이 지연되는 것은 물론 막대한 추가 비용이 소요된다는 업계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방면에 걸친 중국과의 협력관계 역시 국익 차원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셈이다.
중국에 생산거점을 두고 미국에 수출하는 기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은 자국 기업의 피해 확산을 차단할 좀 더 적극적인 대책을 내놓기도 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대만이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대만 정부는 생산공장을 본국으로 옮기는 ‘유턴기업’에 공장부지에 대한 토지규제 완화와 장비 구입, 연구개발 비용 전반에 대한 세금공제 등 상당한 인센티브를 추가로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이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중국산 수출품의 범위를 넓히는 상황에서 중국에 공장을 둔 자국 기업들의 관세 회피와 국내 회귀 결정을 돕기 위해 기업 지원책을 마련한 것이다. 대만은 상당수의 제조업체가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어 미중 무역전쟁의 직격탄이 예상되는 국가 중 하나다.
이러한 대응책은 이미 정부가 실행하고 있는 법인세 및 상속세율 인하 정책과 맞물려 대만 기업들의 ‘리턴’을 부추기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제품 위탁생산 업체인 폭스콘은 대만 디스플레이공장 설립과 총 800억달러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으며 대만 주요 디스플레이 기업인 한스타도 중국에서 생산하는 자동차용 중소형 액정표시장치(LCD) 물량 중 일부를 연내 대만 난커공장으로 옮길 예정이다.
일본 역시 지난 2010년 센카쿠열도 영유권을 놓고 중국과 갈등했던 ‘학습효과’로 무역전쟁 장기화에 대한 대비를 꾸준히 하고 있다. 가령 일본 정부는 신흥국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기업들의 인프라 현지 수출을 적극 지원해왔다. 유럽에서는 제조업 기반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 때문에 무역전쟁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는 독일이 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외신들에 따르면 독일은 올해 들어 기업들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연구개발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도 무역전쟁에 따른 경기 둔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호주 중앙은행(RBA)은 이달 초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1.25%로 내렸고 인도 중앙은행(RBI) 또한 비슷한 시기에 기준금리를 5.7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 외에 뉴질랜드·필리핀·말레이시아 등이 최근 몇 주 사이 줄줄이 금리를 내렸으며 14일에는 러시아 역시 기준금리를 기존 7.75%에서 7.5%로 인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