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기업하기 힘든 나라]살벌한 G2전쟁터서 관군은 딴청..."민병대 홀로 싸우는 꼴"

<4> 무역분쟁에 무방비 노출된 기업

反화웨이 땐 中보복·중국 편들자니 美 무역압박...진퇴양난

툭하면 경영 간섭하던 정부, 이번엔 "기업이 각자 알아서"

전략적 모호성으로 버틸 단계 넘어...민관 공조 발등의 불




요즘 LG유플러스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4세대 이동통신(LTE)에 이어 5세대(5G) 장비도 화웨이 장비를 쓰면서 미국과 중국 양편으로부터 압박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KT 등은 화웨이의 유선망 장비를, 상당수 은행은 화웨이의 중계기를 사용한다. 기업마다 이해관계가 제각각이지만 정부 차원의 조율된 ‘가이드라인’이 마련된 것도, 기업끼리 모여 논의해본 적도 없다. 업계의 한 임원은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댈 상황인데도 아무 움직임이 없다”면서 “정부가 기업 입장을 꼼꼼히 수렴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한 ‘리스트업’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반도체 분야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 메모리 업체인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이 잇따라 화웨이와 거래를 끊으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반사이익이 기대된다는 분석부터 미국이 국내 기업에 선택을 강요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반도체가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고려하면 시나리오별 국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정부는 “기업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원칙론만 되뇌고 있다. 재계에서는 미중 간 고래 싸움에 로키(low key)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외교력을 총동원해 기업 지원에 나서야 하는 정부의 물밑 역할이 보이지 않는다는 쓴소리가 터져 나온다.


◇전쟁터서 뒷짐 진 정부…‘모든 책임은 기업이 져라(?)’=정부에는 아직 무역분쟁과 관련한 전담 조직도 부실하다. 산업통상자원부 내 통상교섭본부, 외교부 내 전략조정지원반이 있지만 기술패권, 무역수지, 국가 안보, 북한 비핵화 이슈 등이 총체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현재의 무역분쟁을 다루기는 버겁다. 달리 말하면 기업이 전쟁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뜻과도 같다. 재계의 한 임원은 “모든 책임을 기업에만 떠민 셈”이라며 “이대로면 미국으로부터 얻어낸 것은 없고 중국에서 기업 피해만 눈덩이처럼 커졌던 사드(THAAD)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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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을 경우 국내 기업의 중국 공장은 사실상 볼모 신세가 될 수 있다. 4대 그룹 계열사만 따져도 중국에 최대 40개의 생산법인이 있다.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가 시안에서 낸드플래시를, SK하이닉스가 우시에서 D램을 생산하고 있다. 설비는 계속 확장세다. 만약 국내 기업이 반화웨이 대열에 합류한다고 해도 반도체업의 특징상 중국 공장 운영을 해코지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중국 당국이 지난해 메모리 초호황 국면 때 3강(삼성·하이닉스·마이크론)에 꺼냈던 가격 담합 카드를 활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답답한 기업들은 슬슬 움직이고 있다. 영상보안장비 업체인 한화테크윈은 최근 IP카메라에서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시스템온칩(SoC) 탑재율을 줄이기로 했다. 미국에 주로 수출하는 데 따른 결정이다. 문제는 미중 양국에 이권이 걸린 대다수 기업은 마음만 졸이는 형편이라는 데 있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지금 무역분쟁의 양상이 우리 정부가 말하는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 식의 전략적 모호성을 갖고 접근할 단계는 지났다”며 “양국이 국가적 명운을 걸로 기술패권 다툼에 돌입한 마당에 정부가 너무 안이한 인식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다른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만 해도 결국 일자리 창출을 위해 무역분쟁을 일으키는 게 아니냐”며 “그런 맥락에서 보면 (기업에 다 알아서 하라는) 우리 정부는 지금의 경제 상황에 뒤떨어지는 감각과 시대정신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통일된 기업 협상창구도 없고, 총체적 외교력 약해져=재계에는 민관이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민병대(기업)만 움직이는 꼴이라는 불만이 많다. 전자 업계의 한 임원은 “기업 차원에서 신냉전에 가까운 무역분쟁에 대응하기는 한계가 있다”며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정부는 딴청만 피우는 셈”이라고 말했다. 일본만 해도 정부가 일찌감치 반(反) 화웨이 전선에 합류하면서 통신장비에 이어 반도체 업종도 미국 편에 섰다. 우리와 사정이 다르기는 하지만 정부가 리더십을 발휘해 비록 단기에 기업 손실이 나더라도 확실한 가르마를 타 혼선을 줄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미중에 설명할 확실한 논리를 만들지 못한 느낌”이라며 “평소 기업에 경영간섭을 많이 해온 이번 정부가 유독 미중 무역분쟁에서는 자율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럴 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가 기업 입장을 정리해 정부에 전하는 교섭창구가 돼야 하는데 적폐로 만들어 더 힘든 게 아닌가 싶다”며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외교 분야의 파이프라인이 부실해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단장은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는 미국과 중국의 정관계·싱크탱크 등의 유력인사에게 우리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데 예전보다 더 약화된 듯싶다”며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IT·가전박람회인 ‘CES 아시아 2019’의 화웨이 전시장에 많은 관람객들이 운집해 있다. 국내 기업들은 미국 주도의 화웨이 제재 움직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연합뉴스최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IT·가전박람회인 ‘CES 아시아 2019’의 화웨이 전시장에 많은 관람객들이 운집해 있다. 국내 기업들은 미국 주도의 화웨이 제재 움직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연합뉴스


이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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