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6월20일, 전 세계가 공황의 몸살을 앓는 와중에 허버트 후버(사진) 미국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정부끼리 모든 채무에 대해 1년간 원리금 지급을 유예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른바 후버모라토리엄은 미국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재무부도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난색을 보였다. 후버는 정치권은 물론 금융관료와 월가의 큰손들을 차례로 설득하는 수순을 밟았다. 최종적으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 미국에 지불 유예를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고 후버가 이를 확대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독일이 총대를 멘 것은 가장 심각했기 때문. 1929년 10월 말 뉴욕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공황이 유럽으로 번진 가운데 유독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국제무역은 날로 급감했고 각국의 도산과 실업 사태 속에 전쟁배상금 책임을 지고 있던 나라들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전통적으로 금융과 산업이 긴밀하게 결합된 오스트리아에서 기업의 경영위기는 바로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 은행들의 도산과 인출 사태는 바로 독일로 파급돼 독일 주요 은행들은 불과 한 달 만에 지급준비금의 절반 이상을 날렸다.
후버모라토리엄은 일주일 사이 15개국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를 미국의 배신으로 여겼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패배해 거액(50억프랑)의 배상금을 문데다 1차 세계대전 때 국토의 대부분에서 전쟁의 참화를 겪은 프랑스는 독일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 정부는 강온책을 병행하며 프랑스를 설득하는 데 나섰다. 모라토리엄으로 상실하는 미국의 원리금이 프랑스의 2.5배라는 점을 강조하며 끝까지 반대할 경우 국제 금융시장에서 고립시키겠다고 위협하자 프랑스도 마지못해 후버모라토리엄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후버모라토리엄은 성공했을까. 1년 동안 사태의 악화를 막았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1932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장기간(23일)의 국제회의에서 후버모라토리엄은 생명력을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대폭 경감(1,320억마르크→30억마르크)하는 대신 유럽의 대미 전쟁부채 119억달러도 깎아달라고 요구했으나 칼자루를 쥔 미국은 탕감은커녕 삭감 논의에도 응하지 않았다. 로잔의정서 채택에 실패한 후 세계는 더욱 공황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각국이 겪은 경제적 고통은 불신과 증오를 증폭시키고 끝내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