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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웅재 선임기자의 관점] 게임중독 진단 기준조차 불명확...사회적 합의 거쳐 대원칙 세워야

■WHO '게임사용장애' 질병코드 등재 논란

"의학계 중심 연구가 오해 키워"

반대 주장에 대한 검증 필요

게임 업계·전문가 등 참여시켜

국내 실정 맞는 진단지침 마련을

29일 오전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백주원기자29일 오전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백주원기자








“일본은 국립중독센터에서 연간 200명의 게임중독 아이들에게 입원치료를 해줍니다. 외래진료도 하고요.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달 게임중독으로 불려온 게임사용장애(gaming disorder)를 오는 2022년부터 새로운 국제질병분류(ICD-11) 체계에 포함하기로 의결하자 후생노동성은 진단기준과 예방·진료지침을 그 전에 마련하려면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한지 등을 센터와 논의하고 있습니다. 독일·호주·말레이시아 등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해국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지난주 일본에서 열린 국제행위중독학회에 다녀온 이해국 교수의 전언이다. 그는 WHO에서 정신건강 영역의 중독 분야 자문위원으로 활동해왔고 국제행위중독학회지(JBA) 편집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중독특임이사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게임중독 아이들을 정부 예산으로 치료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게임세’ 같은 죄악세를 거두자는 식으로 접근해 게임 업계의 반발만 불러일으킬 게 아니라 정부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WHO의 새 국제질병분류는 2022년 발효되는 권고안이다. 회원국들은 국내외 논의사항을 종합해 자국 상황에 걸맞은 진단·진료지침 등을 마련하고 질병으로 등재하게 된다. 보건복지부와 의료계, 문화체육관광부와 게임계가 찬반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을 보이는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로서는 통계청 주관으로 2025년 한국표준질병분류(KCD) 개정 때 질병으로 등재돼 2026년부터 적용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정부는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찬성과 반대, 그리고 중립 인사들이 동수로 참여하는 민관협의체를 구성해 찬반 주장의 근거와 공동연구·실태조사가 필요한지 등을 검토할 계획이다. 논의가 진전되면 서로의 간극을 좁히고 진단기준·진료지침 마련을 위한 대원칙을 세우거나 로드맵을 그려볼 수도 있다.

정부는 “게임 장르·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정신의학계 중심의 연구가 게임에 대한 오해를 키웠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찬반 주장에 대한 근거 검토는 물론 진단기준·진료지침 등을 만드는 과정에 게임 업계와 전문가들의 참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

다만 게임계가 아무리 반발하더라도 게임사용장애를 질병으로 등재하기로 한 WHO의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세계 각국이 속도와 각론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2022년을 전후해 게임사용장애 진단과 관련한 WHO의 정의를 기초로 자국 실정에 맞는 진단기준과 진료지침 등을 마련해 시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정부와 국내 게임 업계도 이런 큰 물결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자칫 한국 게임 업계가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기업들’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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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이름이야 어찌 됐든 게임중독은 존재한다. 이를 한국표준질병분류에 등재하든 안 하든 게임중독자를 잘 치료하고 고위험군이 게임중독에 빠지지 않게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더구나 게임중독에 게임사용장애라는 병명을 붙이고 표준화된 진단·치료를 하는 게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것이 확실하다면 게임 업계도 보다 전향적인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다.

앞서 문체부는 복지부가 주도하는 정책협의체에 불참하겠다면서도 “국무조정실 등이 주관하는 보다 객관적인 협의체가 구성되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필요하면 과학적 검증을 위한 공동연구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게임 업계가 게임사용장애 질병 등재에 날을 세우고 있는 데는 게임을 알코올·마약·도박과 함께 4대 중독의 원흉 정도로 취급하는 입법 추진 등을 경험하며 쌓인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13년 이후에만도 인터넷 게임 매출액의 일정액을 걷어 게임중독 치유 등에 쓰자는 인터넷게임중독 치유·지원법안, 게임을 4대 중독으로 지목한 중독예방·관리·치료법안이 제출돼 ‘게임중독세’ 논란 등만 일으키고 2016년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게임사용장애가 질병으로 등재되면 게임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 시선이 수면 위로 올라와 각종 규제·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또다시 고개를 들 가능성이 크다. 게임 시장이 막강한 자본력으로 무장한 중국에 넘어가 중국의 하청기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게임사용장애를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해야 하는지에 대한 표준화된 진단·진료지침이 아직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상담이 필요한 상태인지, 정신과적 집중치료가 필요한 대상인지를 구분하기도 어렵다. 이 교수는 “의사나 의료기관이 알아서 진단하고 치료하는 실정이다 보니 얼마나 효과적인 치료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등재되지 않고 질병 코드도 없는 국내의 경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우울증·조울증 등 다른 진단명으로 상담·치료하고 있다. 그래서 게임중독과 관련한 의료 관련 통계 생산도, 빅데이터 활용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우울증의 경우 우울에피소드(질병 코드 F32), 재발성 우울장애(F33), 우울증성 행동장애(F920) 등으로 세분화돼 있고 일반인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건의료 빅데이터 개방 시스템에서 우울에피소드나 F32로 검색하면 지난해 건강보험 진료를 받은 사람이 68만4,690명이고 진료비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게임중독이 질병으로 등재되고 표준화된 진단기준과 진료지침이 마련되면 위험군, 질병군, 건강한 이용자군 등을 객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맞춰 예방·조기개입·치료 등 단계적 접근이 가능해진다. 정부에서는 어떤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어떤 단계에서, 어떤 치료·상담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게 좋을지 세밀한 정책을 마련할 수도 있다.

임웅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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