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우리 경제의 성장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라고 다시 한번 강도 높게 비판했다. 지난 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와 10일 경제계 주요 인사 초청 간담회 때보다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높아졌고 메시지는 구체화됐다. 문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가 한국 경제의 핵심 경쟁력인 반도체 소재에 대한 수출제한으로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했다.
당초 외교가에서는 이날 문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적 해법을 찾는 수순의 발언을 내놓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있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한 일본 측의 중재위원회 설치 요청 답변 시한인 오는 18일을 앞두고 한일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날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경제 문제와 연계시킨 것은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역행하는,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일갈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강경 대응은 아베 신조 정부의 이번 조치가 참의원 선거 흥행을 노린 일회성이 아니라 사실상 한국 경제, 특히 반도체 산업을 정밀 타격하기 위한 무역전쟁의 성격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는 상호의존과 상호공생으로 반세기 간 축적해온 한일 경제협력의 틀을 깨는 것”이라며 “우리가 엄중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의 조치와 관련한 문 대통령의 발언은 ‘대응과 맞대응의 악순환은 양국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아(8일)’→‘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10일)’→‘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15일)’ 순으로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아베 정부의 의도가 단순히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반도체 산업 등에 치명상을 주는 것에 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청와대 역시 이를 사실상 무역전쟁의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강경 대응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우리 기업들은 일본의 소재·부품 장비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수입처를 다변화하거나 국산화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며 “결국에는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해둔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이처럼 확고한 대응 의지를 보이는 가운데 정부도 일본에 대한 항의 수위를 높일 방침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날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 제출한 업무보고에서 일본이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반박 의견을 개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실상 전쟁 상황”이라며 “(한국의) 자존심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 12일 한일 실무자 간 양자협의에서 우리 정부의 규제 ‘철회’ 요청이 없었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일본에 ‘원상회복’을 요청했다”고 강력 반박하기도 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법적 용어 차원에서 철회는 ‘적법한 행위에 대한 복구’를 의미한다면 원상회복은 ‘다소 위법적 상황이 발생한 것을 원상으로 되돌리는 조치’로 철회보다 강력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업무보고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응하기 위한 단기와 중장기 대응방안도 제시했다. 단기적으로는 정부와 기업 간 공조를 강화하고 수입국 다변화, 국내 생산 설비 확충, 국산화 기술개발 등을 지원한다. 소재·부품·정비 관련 연구개발(R&D) 시설투자 등에 대한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자금지원 확대 등 세제·금융 지원도 검토한다. 중장기적으로는 핵심 소재·부품·장비에 대해 대대적으로 투자한다.
일본이 한국을 안보상 우호 국가인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면 기존에 포괄허가 대상이었던 전략물자 통제품목 중 비민감 품목 857개도 개별 허가로 전환된다. 군수용과 같은 민감품목 263개는 원래부터 개별허가 대상이다. 캐치올 규제도 적용된다. 캐치올 규제는 수출금지 품목이 아니더라도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이용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 수출 당국이 해당 물자의 수출을 통제하는 제도다.
문 대통령은 다만 이날도 “일본 정부는 일방적인 압박을 거두고 이제라도 외교적 해결의 장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이 일본 정부를 향해 강경한 메시지를 내기는 했으나 여전히 외교적 해결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며 “18일 이후 양국이 외교적인 접점을 찾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윤홍우기자 세종=강광우·김우보기자 seoulbir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