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1717년 헨델의 수상 음악

템스강 연주의 숨은 사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초상화./런던 국립초상화박물관 소장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초상화./런던 국립초상화박물관 소장



1717년 7월17일, 영국 런던. 템스강 일대에 온갖 배가 몰려들고 강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국왕 조지 1세가 배를 타고 연주를 듣는 ‘수상 음악’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행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런던 시민들의 열광 속에 치러졌다. 오후8시께 국왕과 주요 귀족을 태운 왕실의 대형 보트가 화이트홀 궁전을 떠나자 악사 50명을 태운 배가 따라 붙었다. 노를 젓지 않고 강의 흐름을 따라 첼시까지 5㎞를 떠내려가는 동안 악단은 한여름 밤을 21개 곡의 선율로 수놓았다.


오후11시께 첼시에 도착해 잠시 내린 국왕은 크게 만족했다. 국왕의 앙코르 요청으로 악단은 돌아가는 길에 두 번을 더 연주해 이튿날 새벽까지 모두 63곡을 템스강에 띄웠다. 기진맥진한 악단 전원에게 국왕은 일일이 후사하고 작곡과 지휘를 맡은 총감독에게는 연금을 200파운드에서 400파운드로 올려주는 파격을 베풀었다. 그의 이름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독일 태생의 32세 청년 헨델은 더욱 힘을 받아 죽은 날(74세)까지 ‘할렐루야’ 등 주옥과 같은 작품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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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음악의 대명사(the Water Music)로 자리 잡은 헨델의 템스강 뱃놀이 밤 연주는 비화(秘話)로도 유명하다. 독일 하노버 공작을 배신하고 영국에 눌러앉은 헨델의 위기 타개책이 수상 연주였다는 것이다. 헨델을 아꼈던 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죽은 뒤 영국의 왕 조지 1세로 모셔진 인물이 바로 하노버 공작. 얌체 짓으로 괘씸죄에 걸린 헨델이 국왕의 마음을 다시 사려고 기획했다는 설이 오랫동안 정설로 통했다. 헨델의 전기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설득력을 인정받는 해석은 따로 있다. 헨델이 아니라 국왕의 위기 타개책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1714년 영국 왕위를 계승한 조지 1세가 3년이 지난 뒤에야 수상 연주로 헨델과 재회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조지 1세가 즉위 직후 헨델의 다른 오페라를 관람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 왕이면서도 영어를 거의 못해 ‘독일 뚱보’로 놀림 받던 군주는 백성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구실을 찾았다. 수상 음악을 들은 런던 시민들의 환호에 고무된 국왕은 연거푸 ‘한번 더’를 외쳤다. 무엇이 사실이든 확실한 게 하나 남았다. 인류가 불후의 명곡을 얻었다는 점이다. 젊어서 그토록 돈과 명예를 좇았던 헨델은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위대한 영국인’으로 기억된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말년 들어 불우한 이웃과 음악가를 위한 자선을 아끼지 않아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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