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잊혀진 의인들]사진 한장에 운명 맡긴 여인...하와이서 가구 팔아 독립운동 후원

<11> '사진신부' 이금례

조선서 배움 이어가기 어려워

1912년 사진 한장에만 의지

신랑될 사람 찾아 하와이행

마주한 실상 기대보다 암울

남편과 대나무 발 제작·판매

부인구제회·독립군 군자금 등

한인 노동자 166개월치 임금

1만달러 독립운동 자금 지원

이금례./하와이대 홈페이지이금례./하와이대 홈페이지



1912년 하와이에 도착한 배에는 ‘사진신부(picture bride)’라고 일컬어지는 몇 명이 타고 있었다. 사진신부란 미주에 이민 간 한인들이 사진 교환을 통해 고국에서 데려온 신부로 그중에는 그해 봄 대구 신명학교를 졸업한 이금례가 있었다. 이금례는 하와이에 도착한 후 이희경으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신부’ 중에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르거나 영어로 부르기 편하게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그 역시 남편 성을 따라 권희경·권이희경 등으로 이름을 표기했다.

당시 조선의 많은 이가 그러하듯 그도 배움을 지적 유희만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배움을 통해 자신뿐 아니라 주변과 나아가 조선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국권을 강탈당한 식민지에서 배움을 계속 이어가거나 배운 것을 실천할 길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강점은 조선에 사는 모든 한국인을 노예로 전락시켰고 오랜 역사를 이 땅에서 살아온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민족적인 차별을 받았다. 일본은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민족은 정체돼 있고 타율적’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근거를 강점이라는 상황을 통해 한민족에게 강요했다. 결국 이러한 차별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만들었고 이러한 차별에서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사진신부’들. 사진 한 장 들고 남편을 찾아 이역만리로 온 이들 중에는 이금례와 같이 배움을 위해 하와이행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홈페이지하와이에 도착한 ‘사진신부’들. 사진 한 장 들고 남편을 찾아 이역만리로 온 이들 중에는 이금례와 같이 배움을 위해 하와이행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홈페이지


그가 꿈을 이루기 위해 다녔던 신명학교는 영남 최초의 여학교로 1907년 10월 개교했다. 개교 당시에는 12명의 학생이 입학했지만 모두가 함께 졸업할 수는 없었다. 1912년 첫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은 이는 불과 3명뿐이었다. 개교 5년 만에 졸업한 이들 중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이가 그, 이금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금례는 조선에서 배움을 계속 이어가거나 그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것은 그뿐 아니라 당시 식민지 조선에 사는 이들이 느끼는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신명여학교 1회 졸업사진 속 이금례(앞줄 오른쪽)./신명여고신명여학교 1회 졸업사진 속 이금례(앞줄 오른쪽)./신명여고


당시 하와이로 떠난 이들에게는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 배경에는 식민지 조선보다 미국에서의 삶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서 주로 활동하던 선교사 대부분이 미국에서 건너온 북장로교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한몫했다. 그가 다녔던 대구 신명학교 역시 신교육 확산을 위해 대한제국에서 공포한 중학교령(1899년 4월4일)에 따라 미국 뉴저지에서 건너온 선교사 마사 스콧 브루엔(한국 이름 부마태) 여사가 세운 학교였다. 이런 영향으로 그 역시 미국에 자신의 꿈을 걸었고 이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한계를 깨고 싶었던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으로 떠난 많은 이들과 사진 한 장에 의지해 남편 될 사람을 찾아 미국으로 향한 ‘사진신부’의 생각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하와이로 떠날 무렵에는 미국에 대한 인식과 하와이의 삶이 기대한 것만큼 평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대략은 짐작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진 속의 남성이 사진 속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진신부’가 돼 하와이행을 택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고 한편 이러한 어려움은 여성에게 배움보다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길이라 해도 한계를 깰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고 사진 한 장에 의지해 남편 될 사람을 찾아 이역만리로 떠나는 배편에 올랐다. 그해 10월 이금례는 하와이에서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경북 출신의 권도인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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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처음에는 배움이라는 길을 찾아 하와이에 도착했지만 하와이에서 그가 마주한 실상은 기대한 것보다 더 암울한 것이었다. 당시 하와이 한인의 삶은 너무나도 어려웠고 이미 국권을 상실한 조국으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혼살림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려웠다. 그는 배움보다 먼저 생계를 위해 고된 농사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을 찾는 것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국이 독립하면 자신과 가족을 포함해 하와이와 미주에 사는 한인의 삶 역시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이를 위해 우선 한인의 힘을 모을 필요가 있었고, 특히 자신과 주변 여성들의 힘부터 모았다. 이렇게 모은 힘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미주 한인의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대표적으로 대한부인회를 비롯해 영남부인회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활동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지원이었다.

이금례의 남편 권도인씨가 성공의 발판이 됐던 대나무발 ‘포인시아나’를 걸어놓은 서재에 앉아 있다./하와이 대한국민회재단이금례의 남편 권도인씨가 성공의 발판이 됐던 대나무발 ‘포인시아나’를 걸어놓은 서재에 앉아 있다./하와이 대한국민회재단


이금례는 남편과 함께 가구 사업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고향에서 여름에 즐겨 사용하던 대나무발을 만들고 여기에 하와이 풍경에 어울리는 그림을 넣어 팔았다. 이것은 하와이의 열대기후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커튼이었다. 그는 이 대나무발을 ‘포인시아나(Poinciana)’라고 불렀다. ‘포인시아나’는 하와이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그와 가족의 가구 사업 성공은 미주 한인의 발전과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됐다. 당시는 일본이 중국 대륙과 태평양으로 침략 야욕을 확장하고 군사력을 앞세워 팽창정책을 추진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을 비롯해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심각한 자금난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그는 임시정부가 위치한 충칭 특파원 경비를 비롯해 부인구제회 후원, 중국 구제금, 독립군 군자금 등 각종 지원금을 적극 후원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그와 그의 가족이 1935년부터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한 금액은 ‘국민보’를 통해 확인한 것만도 미화로 1만달러가 넘었다. 독립운동의 실행과 지원에 대한 경중을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가족의 지원금 규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당시 1만달러는 미국의 물가 상승과 구매가치 등을 고려할 때 현재 가치로 20만달러에 이르는 금액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고려한다면 당시 미주 한인 노동자는 최저임금에 가까운 수준의 임금을 받았고 미국에서 최저임금이 법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1938년 당시 시간당 최저임금은 0.25달러였다. 만일 한인 노동자가 최저임금으로 하루 10시간 일한다면 2.5달러를 벌 수 있었고 주 6일로 환산하면 15달러를 임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를 월 단위로 환산하면 60달러였다. 즉 1만달러는 당시 한인 노동자 약 166개월 치 임금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약 14년간 단 한 푼도 사용하지 않은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는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기대하던 배움의 길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형태로 배움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자신과 주변 그리고 조국에 기여하고자 했던 꿈을 결국 1945년 해방과 함께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해방 직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그가 꿈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하와이의 다이아몬드헤드 기념공원에 그가 누군지 한글로 적혀 있는 비석 아래 묻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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