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화개장터 전투를 아시나요

1950년 학도의용군 최초의 전투

경남 하동 야산에 서 있는 6·25 참전 학도병 위령비.경남 하동 야산에 서 있는 6·25 참전 학도병 위령비.



1950년 7월 오전4시 화개장터 외곽 야산. 초병 하나가 이상한 보고를 올렸다. ‘길이 막히고 있습니다.’ 찬찬히 살펴보니 도로가 분명히 움직였다. 풀을 꽂아 위장한 북한 인민군 전차가 내려온 것이다. 교량 앞에서 인민군이 장애물 여부를 살필 즈음, 아군 183명이 사격을 시작했다. 이때 시각이 오전5시. 불의의 일격을 당한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진격하며 박격포를 쏘아댔다. 인민군이 아군 진지까지 올라와 따발총을 난사하는 지경에 이르자 중대장은 오전8시께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하동 부근까지 정신없이 달려 인원을 점검하니 70여명이 보이지 않았다.


인민군과 조우했던 아군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불과 3일 전에 소총을 지급 받은 여수·순천 학도의용군. 화개장터 전투는 일방적 패배지만 전략 차원에서는 6·25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로 손꼽힌다. 학생들의 상대는 인민군 6사단. 중국의 국공내전부터 실전경험을 쌓은 최정예부대였다.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낙동강 전선에 도달할 즈음 공세소멸점에 도달한 다른 인민군과 달리 개전초 전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한강을 처음 건넌 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하동을 거쳐 동쪽으로 진격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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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항공정찰을 통해 인민군 6사단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7월23일. 윌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대경실색했다. 빠르게 동진하는 적 6사단에 대응할 부대가 없어 마산도 위험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낙동강 방어선의 옆구리가 터져 부산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 워커 사령관은 상주에서 싸우던 미군 1,000명을 급히 빼내 하동으로 보냈다. 여순 학도의용군이 6사단의 진격을 저지했다는 사실은 미군도 몰랐다. 촌각이 귀중한 순간에 여순 학도의용군은 3시간 넘게 인민군의 발을 묶었다.

미군 병력은 27일 인민군 6사단과 싸웠으나 한자리에서 전사자 400명을 내며 철저하게 깨졌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채병덕 장군도 여기서 죽었다. 아군은 두 번 졌어도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뒤늦게 전열을 정비한 아군은 마산에서 인민군을 막아 전시 수도 부산을 지키고 전황을 되돌렸다. 육군 군사연구소장을 지낸 한설 예비역 준장은 ‘이들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부산이 점령당할 수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죽음으로 나라를 구한 15~18세 소년들을 대한민국은 얼마나 기억할까. 사료마저 거의 없다. 전사자와 생존자를 통틀어 유공자로 인정받은 학도의용군은 극소수다. 군적에 없는 탓이다. 추모제 지원금 연간 250만원이 정부 보훈의 전부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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