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2년부터 3년간 네덜란드 원정대에서 복무한 영국 귀족 조지 개스코인(1525~1577)은 병사로 시작해 군인 500명을 이끄는 하급 지휘관까지 올라갔으나 스페인 군대에 항복하는 바람에 반역자로 몰렸다. 그는 자신의 군 경험을 담아 ‘전쟁은 체험하지 않은 자에게만 달콤하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전쟁을 찬양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그는 “불안한 전투, 난도질당한 시체, 불구가 된 팔다리, 짧아진 수명, 불안한 잠, 소름 끼치는 꿈, 근심”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말들을 읊조린다. 명예와 부를 위해 전장에 나가는 사람에게는 비참함 만이 따를 것이라는 경고다.
‘사피엔스’를 필두로 한 ‘인류 3부작’ 통해 세계적인 미래학자로 자신을 각인시킨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이 출간됐다. 국내에서도 인기 높은 하라리 교수의 세부 전공은 ‘중세 전쟁사’이다. 이 책은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했다. 흥미로운 것은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이라는 부제다. 출판사인 김영사 측은 “저자가 세상의 의미를 구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쓴 셈”이라며 “이 책은 ‘우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전에, 저자가 역사 속 ‘나’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들기 위해 하라리가 주목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 군인들이 남긴 회고록이었다. 1450년에서 1600년 사이에, 34명이 쓴 프랑스어·독일어·스페인어·영어 등의 문헌을 파헤쳤다. 그들의 회고록은 17세기 중앙집권적 근대국가가 등장하기 전의 ‘역사’와 ‘개인사’ 사이의 긴장관계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한국인이 잘 아는 전쟁 기록으로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있다. 군대를 이끄는 수장이, 시간순으로 기록한 글이었다. 반면 저자는 상급 전투원이 아닌 하급 전투원들이 쓴 회고록에 초점을 맞췄다. 높은 계급의 군인이 남긴 용감하고 영광스러운 전쟁의 이미지와 달리 부하들의 기록은 ‘전쟁은 지옥이고 군인은 희생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전쟁에 대한 당대의 견해가 훨씬 더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봤다.
그 시절은 왕과 민족을 핵심으로 한 ‘역사 만들기’가 가동하기 시작한 때다. 하라리는 ‘무용담’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오히려 당대 진실성의 원천이 목격과 경험 등의 ‘팩트’ 보다는 귀족의 명예에 더 기댔다는 점에 주목한다. 진실은 목격자가 아니라 명예를 지닌 귀족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한편,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 이은 인류 3부작의 완결편 격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두고 유발 하라리가 불명예스러운 구설에 휘말렸다. 러시아어판을 출판하면서 책 속에 등장하던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비판 내용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보다 많은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