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일본은 오랜 기간 동반자이자 협력자 관계였습니다. 이런 기반이 무너지게 될 경우 양국 모두 심각한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도자들이 상기해야 합니다. ‘강대강’ 전략은 장기적으로 양쪽 모두에 손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일 정치지도자가 양국 간 협의와 대화를 중시했던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대담=문성진 정치부장 hnsj@sedaily.com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 창간 59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에서 “그 정신을 버리고 그저 쉽게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해서 국가 간 적대감을 끌어들여 이용하는 정권이나 정치인들이 문제”라며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카운터파트를 만난 것이 불행이다. 그러나 카운터파트를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고, 그 행태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상황이 최악으로 가지 않도록 다양한 노력을 펼치는 게 옳다”며 “그런 차원에서 국회도, 기업도, 정부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의장은 국회 방미단을 이끌고 지난달 24일부터 3박5일간의 일정으로 워싱턴DC에서 미일 의원 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였다. 방미단이 같은 달 26일 참석한 한미일 3국 의원회의는 원래 친목 도모의 성격이 짙지만 이번 회의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는 현장이 됐다.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며 외교전을 치르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는 약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긴 시간을 할애해 한일관계가 어그러지게 된 배경과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해 설명했다. 또 문제해결 방식도 제언했다.
“근본적으로 아베 신조 정권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였던 정권부터 있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베는 정치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한국을 끌어들여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 경향이 최고조에 달한 게 바로 지금 상황입니다. 일각에서는 정상외교를 통해 ‘톱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하지만 아직 접점이 형성되지 않았으므로 ‘보텀업’ 방식의 대화가 우선돼야 합니다.”
6선 국회의원으로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정 전 의장은 외교뿐 아니라 정치·경제 등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당면한 문제와 해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먼저 4차 산업혁명이라는 큰 물결 속의 우리나라 현주소와 과제에 대해 지론을 폈다. 그는 의장 시절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해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미래 환경변화 예측을 위해 국회미래연구원을 설립하면서 정치권 차원의 4차 산업혁명 대응에 앞장섰다.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사실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선두에 있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가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적응을 잘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누렸던 강자의 위치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 평가를 해보면 좀 불안합니다. 정치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우리 정치는 그걸 잘 못하고 있습니다. 의장 시절 ‘4차 산업혁명(디지털 기반 산업) 기본법’을 발의했는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그 법은 아직 상임위원회의 문턱도 넘지 못했습니다.”
정 전 의장은 정부와 기업·노동조합 등을 향해서도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변화를 주문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진짜 실력 있는 기업·사람·국가와 그렇지 않은 기업·사람·국가 간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될 것”이라며 “관련 산업역량을 갖추지 못한 국민은 도태하게 돼 있다. 그러면서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산업계가 부족한 것은 정부의 탓도 있는 만큼 정부는 정책적으로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민관이 힘을 모아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인공지능·빅데이터·사물인터넷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와 미세먼지-기후변화-에너지 전환에 대응할 산업 분야에 투자할 필요가 있다. 교육혁신을 통한 창의적 인재 양성, 제조업 혁신을 통한 신성장산업 육성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힘줘 말했다. 노사에는 “노사가 산업화 시대의 패러다임과 사고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립하는 것은 정말 맞지 않는다.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그 세상에서 어떻게 생명력을 유지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정 전 의장은 본지가 창간 59돌 특별기획으로 보도 중인 ‘노동4.0’ 관련 주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방점을 ‘사회적 대타협’에 찍었다. “민주노총 나름의 고충과 입장은 있겠으나 대화의 틀마저 거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역으로 노동을 배제하는 것 역시 사회적 대타협을 요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사회경제적 환경이 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는 구조적 변화에 공감하고 새로운 해법을 만드는 일에 모든 주체가 동참할 때 위기극복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치 ‘구루’에게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된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 현재의 정국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 전 의장은 질문의 취지에 크게 공감을 표한 뒤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과거에는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일은 하자는 분위기였다. 또 지도부 간 협상이 막히면 중진들이 막후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고 토로했다.
구체적으로 입법 정체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자 정체의 요인부터 개선책까지 아울러 설명했다. “20대 국회가 다당체제가 되다 보니 소수의 비협조만으로 전체가 공전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착상태의 원인을 다당체제와 다수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도입한 국회선진화법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책임합니다. 물론 선진화법은 분명히 손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별개로 소수의 쟁점법안 때문에 다수의 무쟁점법안과 ‘민생’법안의 발이 묶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회기에 관계없이 법안 심사는 상시적으로 진행돼야 할 것입니다.”
국가기관 3부의 한 축인 입법부 수장을 지낸 정 전 의장에게 우리나라에 맞는 권력구조가 어떤 형태인지를 물었다. 그는 “대통령 중임제나 내각제나 모두 일장일단이 있는데 정치학자들을 만나보면 책임정치 구현 측면에서 내각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러나 의회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높지 않은 현 상황에서 내각제는 사실상 도입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권력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헌법에 어떤 가치를 담을 것인가’”라며 “개헌의 핵심은 분권이 돼야 한다. 대통령과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는 것은 시급하고 중차대한 과제”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에 정 전 의장이 잠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돌릴 때 7선 도전 여부를 결정했느냐고 질문했다. 정확하게는 “가을에 결단하겠다는 ‘공식 답변’은 지금도 변함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라고 화답했다. 정 전 의장의 지역구는 정치 1번지 종로이다. 6선 의원이지만 ‘종로 초선 의원’이라는 점을 늘 강조했을 정도로 지역구에 대한 애착이 강한 그다. 내년 총선에서 종로 출마 잠정후보로 여권에서는 임종석 전 비서실장, 야권에서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는 정치권에서 돌고 있는 ‘국무총리설’과 관련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끝으로 내년이면 창간 60주년을 맞는 서울경제에 대한 제언을 청했다. “사람으로 치면 60세면 경륜이 묻어날 나이입니다. 서울경제는 60년 동안 한결같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경제 분야의 동향을 제대로 꿰뚫고, 정책 담론과 국민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기업인들이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해온 것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경제의 변화와 흐름을 선도하는 매체, 정론 형성의 중심 매체로 자리매김해주기 바랍니다.” /정리=임지훈·하정연기자 jhlim@sedaily.com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