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일 “임진왜란 때 일본이 탐을 냈던 것도 우리의 도예가, 도공들이었다고 한다”며 일본의 무역보복을 기술 자립으로 돌파하자고 호소했다. 실제 일본에서 임진왜란은 당시 최첨단 기술이던 자기(磁器) 확보를 위한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면 납치됐던 조선 도공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국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다. 천시받던 도공들은 사무라이와 같은 계급으로 우대 받았고 몇 년 만에 재산도 크게 모았다. 지역 봉건 영주들은 귀인 대접을 하며 모셔갔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도공 이삼평의 추모비와 신사까지 세워 ‘도조(陶祖)’로 추앙하고 있다.
다들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이라는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사대부 양반들은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는 자신들의 실무적 무능함을 예송논쟁 같은 말장난으로 감추었다. 상인이나 기술자를 천시하는 사농공상 풍조에 나라가 부강해질 리 없었다. 파이가 커지지 않다 보니 지배계급은 백성들을 쥐어짜는 데만 골몰했고 분배에 민감한 사회문화가 형성됐다. 집단으로서의 그들은 청빈과 안빈낙도를 외쳤지만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 탐욕스럽게 재산을 모았다. 위선적이었다.
관노 출신으로 천재 과학기술자였던 장영실은 1442년 곤장 80대를 맞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세종대왕이 탈 가마가 부서졌다는 게 이유였다. 장영실은 감독만 맡았을 뿐 직접 제작하지도 않았다.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했다는 세종대왕이 내린 은전이란 곤장 100대를 20대 깎아준 것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법령을 담은 ‘대전후속록’은 책 한 권에 하나의 오자가 나오거나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글자가 한 자 있을 때면 인쇄 담당자들이 30대의 매를 맞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행착오를 동반하는 혁신과 창의에 장인들이 나설 리 만무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정부의 과학정책 탓에 혁신 기술이 나오기 어려운 오늘날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맞서 이제야 이공계 인력을 키우고 과학기술을 육성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원전 등 과학기술 정책을 펴고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을 적폐로 몰아 쫓아내려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근거 없는 낙관론인지 몰라도 우리 기업은 일본의 수출 규제를 시간만 주어진다면 잘 극복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 경제는 기업부실과 사채 파동, 오일쇼크,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등 더 큰 위기도 이겨냈고 그 과정에서 경제체질도 업그레이드해 왔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 시대착오적인 사농공상 문화가 유령처럼 다시 퍼지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기업가정신과 역동성이 말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권은 마치 조선 사대부처럼 정통성에 집착해 과거사, 적폐 청산 등 도덕 이슈로 사회를 이끌어나가려 한다. 최저임금 인상, 52시간제 시행 등에 대한 기업의 현실적인 고민은 외면 당하기 일쑤다. 일부 정치권, 자칭 ‘지식인’이라는 책상물림들이나 시민단체 전업 활동가들은 ‘대기업 때리기는 정의’라는 사명감을 불태운다. “방금 재벌 혼내고 왔다”(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 “모두가 용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등의 발언에서는 뒤틀린 선민의식을 엿보는 듯하다.
문 대통령은 부디 이번 기회에 조선의 도공들처럼 한국인 과학자들이 미국에서 왜 돌아오지 않는지 고민했으면 한다. 이상이 현실을 압도해 기업이 천시받고 학자가 창업해 돈 버는 것을 죄악시하고 비전문가가 전문가에 군림하고 규제 완화가 이념의 벽에 가로막힌 나라에서 혁신은 현실성 없는 기대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세계 문명사에 한 획을 그은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발명하고도 개발자의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choihuk@sedaily.com
편집자 주: 이 글은 정병석 한양대 특임교수(전 노동부 장관)의 저서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를 상당 부문 참고했다. 제목에 이끌려 우연히 집어 들었지만 조선 지배계급의 행태가 지금과 놀랍도록 유사해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 성장 잠재력이 후퇴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