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색인문학] 르네상스 거장 3인 위상을 바꾼 낭만주의

■예술가, 그 빛과 그림자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

이연식 미술사가

자기 스타일 집착 안하는 라파엘로

주문자 요청에 맞춰 우아하게 변신

르네상스 '모범적 기준'으로 떠올라

18세기 질서에 저항 낭만주의 등장

좌절·감동 담긴 예술이 매력 끌어

미켈란젤로 새롭게 평가받기 시작

다빈치는 '서구미술 대표' 자리잡아

한 세기에서 한 명. 아니, 한 나라에서 한 명도 나오기도 어렵다는 천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세 명이나 나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다. 유럽인은 오랫동안 이들 ‘거장’ 중에서 라파엘로를 맨 위에 놓았다.

라파엘로, 황금방울새의 성모, 1506~1507년, 우피치미술관라파엘로, 황금방울새의 성모, 1506~1507년, 우피치미술관



라파엘로는 공작의 궁정 화가였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신부였던 삼촌 밑에서 자랐다. 페루지노의 제자로 페루자에서 활동을 시작해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금세 스승을 뛰어넘었다.


페루자를 ‘평정’한 라파엘로는 피렌체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 마침 피렌체에서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경쟁하며 전성기의 명성을 구가하는 중이었다. 라파엘로는 다빈치가 공간의 분위기를 미묘하게 연출하는 수법을 흡수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모사하며 연구했고 그 방식으로 초상화를 여럿 그려서 재미를 보았다. 라파엘로의 작품 중에서도 ‘성모자’를 그린 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졌는데 성모와 아기 예수가 이루는 구도는 다빈치의 선례를 이어받은 것이다. 근육질의 인물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미켈란젤로의 방식도 라파엘로는 받아들였다.

1508년 로마에서 라파엘로의 재능은 폭발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바티칸 궁전 내벽을 새로이 꾸미는 일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라파엘로는 ‘서명의 방’과 ‘엘리오도로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을 연달아 작업했다. 교황은 벽화 그리는 법에 익숙지도 않았던 20대 중반의 라파엘로에게 일감을 몰아주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암굴의 성모, 1483~1486년, 루브르미술관레오나르도 다빈치, 암굴의 성모, 1483~1486년, 루브르미술관


다빈치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에게 밀려 결국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미켈란젤로 또한 라파엘로와의 경쟁에서는 불리한 처지에 놓이고는 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를 거창하게 조성하려던 계획은 지지부진했고 내키지 않은 천장화 작업을 해야 했다. 라파엘로가 바티칸의 내벽을 바라보며 금을 칠하던 것과 비교하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붓질하는 미켈란젤로는 권력의 중심에서 비켜난 셈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일찍이 걸작을 만들어내며 찬탄을 받고 있었음에도 교황이 라파엘로를 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라파엘로는 말을 잘 듣고 일 처리가 깔끔했다. 주문자의 요청을 만족스럽게 구현하면서도 신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미켈란젤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1507년, 우피치미술관미켈란젤로, 성모자와 세례 요한, 1507년, 우피치미술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예술가들은 종교적인 주제라도 이치에 맞고 납득할 수 있도록 묘사하려 했다. 이전까지 성인과 천사,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여러 관례가 뒤엉켜 혼란스럽고 모순적이었다. 하늘을 나는 천사의 발이 보여야 할까, 보이지 않아야 할까.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유다에게 후광을 그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후광을 넣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고 있자면 죄인들을 주먹으로 두들겨 패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사내들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천사에게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후광으로 둘러싸인 성인과 세 쌍의 날개를 지닌 괴상한 천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렸다. 성경 속 장면을 그릴 때 금을 듬뿍 칠하라는 교황의 요구를 미켈란젤로는 가볍게 무시했지만 라파엘로는 여기저기 금을 발라서 그림을 번쩍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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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작품 속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역대 교황, 사도 베드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등 중요한 인물의 얼굴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물론 교황이 주문한 것이다. 바티칸에서의 작업이 끝나기 전에 율리우스 2세가 죽고 뒤이어 레오 10세가 즉위했는데 라파엘로는 레오 10세의 얼굴 또한 바티칸의 벽화 군데군데 집어넣었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의 벽화 작업을 맡았다면 교황의 얼굴을 순순히 그려 넣었을까. 갖은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거나 매우 암시적인 방식으로 등장시켰을 것이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게 있던 집착과 편벽이 라파엘로에게는 없었다. 라파엘로는 임무를 수행하듯 담담하게 그렸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뭘 그려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지만 라파엘로는 주제와 여건에 맞춰서 변신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로마 가톨릭의 중심부에 있던데다 우아하고 균형 잡혀 있어 고전적인 규준으로 떠받들어졌다.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등장한 ‘라파엘 전파(前派)’는 라파엘로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유파의 젊은 화가들은 라파엘로 이후의 미술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이기에 라파엘로 이전의 순수하고 자연주의적인 미술을 추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전성기 르네상스의 성취를 대표하는 존재가 다빈치도, 미켈란젤로도 아니고 라파엘로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세 예술가의 위상은 크게 달라졌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결정적으로 라파엘로를 제치게 된 것은 낭만주의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의 관념 속에서 예술가는 스스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열정에 휘둘리며 외적인 조건과 불운의 모순에 쓰러지는 존재로 여겨졌다. 예술가의 작품과 삶이 감동을 주는 것은 비극적인 좌절과 파멸 덕분이다. 관객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뜻밖의 방식으로 사로잡힌다. 예술가가 규준과 관례에 어깃장을 놓은 부분, 스스로의 기질과 고집을 내세우는 부분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이끌린다.

이에 비하면 라파엘로의 그림은 편안하고, 우아하고, 탁월하고, 적절하다. 라파엘로에게는 결핍과 모순이 없어 보인다. 라파엘로는 지난 시절의 모범적인 예술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던지라 규준과 질서에 대한 저항을 원동력으로 삼았던 미술사에서 그의 위상은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박한 평가를 받았던 다빈치가 20세기 이후로는 신비로운 매력과 불가사의한 역량의 소유자로 존경받으며 서구 미술을 대표하는 존재가 됐다. 강점은 약점이 됐고 약점은 강점이 됐다.



송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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