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치악산자락으로 차를 몰면 대단위 신규 주거지가 눈에 들어온다. 의료·바이오 산업을 유치하겠다던 원주혁신도시다. 참여정부 시절에 지정된 전국 10개 혁신도시 중 하나다. 8월 마지막 주말에 개인용무로 현지를 찾았던 기자는 깜짝 놀랐다. 정오를 넘긴 무렵인데도 시내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입주자를 구하지 못해 ‘임차인 급구’ ‘급매’ 등의 글귀를 적어놓은 건물들이 많았다. 혁신도시로 지정된 후 땅값이 급등했고 그로 인해 아파트·건물도 덩달아 비싸져 미분양이 속출했다. 수도권 공공기관이 일부 이전했지만 인구유입 효과가 크지 않았다. 그나마 이전기관 직원의 상당수도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아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면 ‘유령도시’가 된다고 한다.
경남·경북·전북·충북 등에서도 혁신도시가 미분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개발과정에서 해당 지자체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막대한 부채를 졌다. 반면 개발과정에서 풀린 토지보상금 중 상당액은 원정부동산 투자 바람을 타고 강남 등 서울 인기 주거지역으로 흘러들어 강남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국토균형개발정책은 도리어 ‘강남불패, 지방침체’라는 역설적 결과로 이어졌다.
정부가 중앙부처를 대거 이전한 세종특별시는 어떨까. 최근 이전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비롯해 대부분의 중앙정부 부처가 옮겨갔다. 인구는 30만명을 돌파했다. 얼마 전에는 LG유플러스가 세종시와 자율주행 셔틀버스 상용화를 위한 협약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개발된 부지는 세종시 전체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 행정부는 거의 다 입주해 추가로 유입될 공무원 수는 제한적인데 나머지 부지까지 개발된다면 지방 혁신도시들처럼 미분양 딜레마에 봉착할 수 있다. 그나마 추가로 유입되는 인구는 서울이 아닌 대전 등 인근 지역 사람들이다. 세종시가 주변 지역의 인구성장 잠재력을 빼앗는다는 비판을 듣게 된 것이다. 그 눈치를 보느라 광역고속철도나 지하철역조차 세종시에 건설하지 못하니 수도권 인구는 더더욱 이전을 꺼린다. 결국 중앙부처 공무원들만 지리적으로 세종시에 ‘격리’돼 정책수요자인 민간기업·시민들과 만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모두가 국토균형개발이라는 명분하에 빚어진 블랙코미디다. 이상은 좋았으나 현실을 보지 못한 결과다. 그 밑그림이 담겼던 4차 국토종합계획 기간이 곧 마감된다. 정부는 2020~2040년에 적용할 5차 국토종합계획을 연말까지 심의한 뒤 확정한다. 정부가 5차 계획에는 이상에만 치우친 허상을 지우고 현실적인 정책을 담기 바란다. /newsroo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