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 경술국치일’에 박근혜 전 대통령 등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핵심은 뇌물죄 부분에 대한 파기환송인데 그 내용을 둘러싸고 논란이 적지 않다.
일단 박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및 2심 재판에서 뇌물 혐의를 다른 범죄 혐의와 구분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 것은 적절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로 인한 형량 증가의 문제는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이미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은 징역 25년에 벌금 200억원이었고, 박 전 대통령의 나이를 생각할 때 형량을 늘리는 것은 상징적 의미 이상을 갖기 어렵다.
오히려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원심과 달리 말의 소유권이 사실상 최순실에게 이전된 것으로 보고 뇌물 액수를 산정한 점이다. 이로 인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실형 선고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일부 대법관들의 반대의견이 제시됐고,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의 뇌물수수죄 공동정범 인정에 대해서도 대법관 4인의 반대의견이 있었다.
여기서 복잡한 법리적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본원칙부터 되짚어보자.
첫째, 법은 정의(正義)를 지향하며 법원의 판결은 공정해야 한다. 법이 감정을 전혀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에 치우친 법 판단은 공정하기 어렵다. 예컨대 엄벌주의(嚴罰主義)니 일벌백계(一罰百戒)니 하는 것들은 공정을 침해하기 쉽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할 것인데, 여론의 압력이 가해지거나 판사의 법감정을 자극한다고 해서 더 중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은 공정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공정한 재판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가 기준의 일관성이다. 여론의 주목을 받는 판결에서, 혹은 정치적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이는 판결에서 기존의 판례를 벗어난 새로운 기준을 적용한다면 누구라도 그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하게 될 수 있다.
셋째, 법원의 권위는 법원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되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통해 확고해진다. 법원이 제 역할을 소홀히 할 경우에도 그 권위가 실추되지만, 과도하게 자신의 활동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사법의 본질을 벗어나거나 다른 국가기관의 역할을 침해할 경우에도 법원의 권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원칙들에 비춰 볼 때 이번 대법원 판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1심과 2심 판결에 대해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대법원 판결에서는 엄벌주의가 아닌 공정한 재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어야 한다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동안 뇌물죄의 적용에 관해서는 정말 논란이 많았다. 특히 대가성의 인정에 대해서는 법원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그로 인해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더라도 일정 액수 이상의 금품수수가 있으면 비록 뇌물죄가 적용되지 않더라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제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뇌물죄 인정 기준이 크게 완화됐고, 더불어 과거와는 달리 직권남용죄의 인정 기준도 완화됐다. 이를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더불어 검찰에서 기소하지 않는 SK의 자금지원을 뇌물로 본 것도 적절치 않았다. 사법의 공정성을 위한 전제는 중립성과 독립성뿐만 아니라 소극성과 수동성도 포함한다. 기소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 재판하는 것은 사법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며 대법원이 법률심으로서의 역할을 벗어난 것이기도 하다.
현재 법원은 민주화 이후 가장 심각한 사법 불신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법원이 여론의 추이를 고려해 재판하는 것은 사법의 본질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사법에 대한 신뢰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사법부는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공정한 재판을 일관성 있게 계속하는 사법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