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여는 수요일] 노을

- 이면우

세상은 아주 오래된 부엌입니다 길가로 난 어둑한 문 안에서 누군가, 느지막이 길 가는 이를 위해 가마솥 가득 붉은 수수죽을 쑤는 중입니다 타박타박 발자국에 물 한 바가지 부어 휘젓고 뚜벅뚜벅 발자국에 크게 한 바가지 더 붓고 휘휘저어 슬긍긍 뚜껑 닫고 아궁이를 들여다봅니다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당신이 지금 허리 굽혀 아궁이를 들여다보는

관련기사



바로 그 눈 아닙니까

0215A38 시로여는수욜



나그네 눈길이야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굴뚝으로 향하기 마련이지요. 나그네 발길이야 코끝으로 스미는 구수한 내음 좇기 마련이지요. 얼마나 많은 수수를 맷돌로 탔기에 발걸음마다 물 한 바가지씩 부어도 붉은 기가 흐려지지 않을까요. 새알심 같은 석양조차 넣어두었군요. 두레상에 앉아 한 그릇씩 비우니 부꾸미 같은 달님이 둥실 떠오르네요. 수수깡 안경을 쓰고, 수수깡에 호랑이 피가 물든 이야기를 듣던 어린 나그네는 동아줄 타고 오르는 꿈을 꾸네요. 수수죽을 내어주는 이도, 받아드는 이도 전대를 풀지 않는 까닭은 저마다 나그네임을 알기 때문이지요. <시인 반칠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