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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전설이 된 ‘명예’ 인간문화재 두 사람

정재숙 문화재청장

정재숙 문화재청장정재숙 문화재청장



그의 이름 앞에는 ‘전설의 사진기자’라는 수식어가 붙곤 했다. 지난 15일 타계한 원로 사진가 정범태(1928~2019) 선생이다. 그의 부음이 뒤늦게 알려진 까닭은 고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선생은 ‘외부에 알리지 말고, 빈소도 만들지 말며, 주검은 가톨릭 성모병원에 기증하라’는 유지를 가족에게 남겼다고 한다. 장례절차가 모두 끝난 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은 ‘그다운 이별’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정 선생은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가 1세대로 꼽힌다. 40여 년 일간지 사진기자로 현장을 뛰며 한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정직한 시선으로 기록했다. 1960년 4월 18일 서울 종로 천일백화점 앞에서 3·15 부정선거 비판 가두시위를 벌이던 고려대생 피습 장면은 그의 카메라에 담겨 4·19 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군사 법정에 피고인으로 선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의 모습은 국제사진전에서 10대 걸작으로 선정됐다. 그의 사진 세계는 이런 투철한 리얼리즘 정신에 더해 한국 풍류의 속살을 사진으로 채록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입소문을 따라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며 발굴한 명인과 명창이 수백 명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할 만한 춤꾼 120명을 취재한 ‘한국의 명무(名舞)’는 장안의 화제가 됐던 집념의 기획이었다.


지난 2015년 8월 25일 저녁, 서울 한국문화의집(KOUS)에서 열린 ‘화무(火舞), 십이홍(十二紅)’ 무대 뒤쪽에도 정범태 선생이 우뚝 서 계셨다. 당시 87세 현역이었던 그는 2시간 남짓, 진중하게 셔터를 눌렀다. 이날 공연이 끝나고 카메라를 챙기면서 정 선생은 지나가는 말처럼 “춤은 귀로 듣는 것이요” 했다. 그는 사진에 귀가 달린 명예 인간문화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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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고 부르는 명칭의 정식 이름은 국가무형문화재다. 예능과 기능 분야에서 예술·역사·학술적 가치가 큰 종목을 나라가 인정해 잘 전승되도록 보호하는 제도다. 이 인간문화재라는 말을 처음 만든 이는 예용해(1929~1995) 선생이다.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그는 그 전문성을 인정받아 민속연구자이자 문화재위원으로 평생을 헌신했다. 그가 1960년 7월부터 62년 11월까지 한국일보에 50회에 걸쳐 연재한 ‘인간문화재’는 열독률 높은 기사이자 귀중한 자료였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뒤 문화재관리국 실무자들이 이 연재물 스크랩을 공부하며 정책을 입안하고 실무에 적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선생의 고향인 경북 청도 박물관에서 지난 3일 시작한 ‘언론인 예용해, 민속문화의 가치를 일깨우다’는 그가 왜 ‘문화재 기자의 전설’로 불렸는가를 보여주는 기획전이다. 전국을 발로 뛰며 수집한 사료와 민속품은 그가 추앙하고 헌신했던 장인정신이 무엇인가를 증언한다. 경복궁의 대목(大木) 일을 했던 한 늙은 도편수와 그의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어떤 자질을 갖춰야 우두머리 목수가 될 수 있을까요.” “영의정감은 되어야겠죠.”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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