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국사암은 신라 문성왕 때 중국 유학승 출신 혜소가 지은 암자다. 국사암은 처음에는 보월암이었지만 신라 민애왕이 혜소를 스승으로 모시고 ‘진감국사’를 하사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국사암 입구의 느티나무는 진감국사가 국사암을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나무로 알려졌다. 이곳의 느티나무는 진감국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곳에서 자란 나무라는 얘기가 전한다. 국사암의 느티나무 같은 전설은 우리나라의 나이 많은 나무들에서 적잖이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같은 얘기는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긴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이른바 신목(神木)의 탄생에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곳 느티나무를 안고 돌면 소원을 이룬다는 속설도 나무가 오래 살 수 있는 인문적인 조건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안고 돌거나 만지고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안타깝게도 디지털하동문화대전을 비롯해 인터넷 관련기사 중 대부분은 이곳의 느티나무를 느릅나무로 표기한다. 느릅나무는 느릅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의 자식이지만 종류가 다른 나무다. 이곳의 느티나무는‘사천왕수(四天王樹)’로 불린다. 사천왕은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있는 사왕천(四王天)의 주신(主神)인 네 명의 외호신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과 본당 사이에 위치한 천왕문이 바로 사천왕을 모신 곳이다. 이곳의 느티나무를 사천왕수로 부르는 것은 국사암 일주문 앞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네 개의 줄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사암에는 사천왕이 없다.
나는 이곳을 직접 찾기 전까지 국사암의 사천왕수를 느릅나무로 알았다. 디지털하동문화대전은 물론 거의 모든 국사암 관련 인터넷 기사에서 느릅나무로 소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느릅나무를 찾았지만 국사왕 안과 밖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국사암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일주문 앞 느티나무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느릅나무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릅나무를 느티나무로 확인하는 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사암은 규모가 크지 않아 금세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국사암에 들어가 아미타후불탱과 선사의 진영을 만났다. 특히 선사의 진영을 보면서 고운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를 떠올렸다. 아울러 나는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와 지리산자락에 심은 차나무를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조성한 차밭도 생각했다. 쌍계사 입구에는 우리나라 차 시배지가 있고, 쌍계사 인근에는 우리나라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차나무가 살고 있다.
내가 국사암을 찾은 것은 느릅나무를 확인하는 것과 더불어 산신각을 보기 위해서였다. 산신각은 산을 지키는 주인공을 모시는 건물이다. 산신은 민간 신앙이었지만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불교 사찰 내에 산신각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산신각을 사찰 내에 들인 것은 민간신앙을 포용하는 정책 덕분이었다. 그래서 사찰을 찾는 사람 중에는 부처님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산신각을 찾는다. 현재 전국 사찰에 거의 예외 없이 크고 작은 산신각이 있는 것은 그만큼 불교에서 산신을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국사암의 산신각은 우리나라 남쪽 지역의 산신각 중에서도 아주 독특하다. 우리나라 산신각에는 대부분 남자 산신이 있지만 국사암 산신각에는 여성 산신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산신각에는 산신도가 있다. 산신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세 가지 요소, 즉 산신·소나무·호랑이가 기본으로 등장한다. 나는 산신도의 세 가지 요소가 우리 민족정신과 문화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산신도의 산신은 ‘삼국유사’에서 언급하듯이 1908년을 살다가 산신이 된 단군이고, 호랑이는 곰과 함께 ‘단군신화’에 등장할 뿐 아니라 한반도의 지형을 닮았고, 소나무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사암에는 단군을 닮은 남자 산신이 아니라 여성 산신이 그려져 있다. 국사암 산신도에 여성 산신이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성의 성격을 가진 지리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국사암 산신각은 아주 높은 자리에 있을 뿐 아니라 가파른 돌계단 덕분에 위엄이 넘친다. 특히 산신각 입구에 사는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밤나무는 산신각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밤송이의 가시는 밤알인 씨방을 보호할 뿐 아니라 산신각에 사악한 기운이 들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밤은 제사에 올리는 성물(聖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조상의 제사에 밤을 올리는 것은 밤나무 열매가 뿌리를 내린 후에도 밤알의 껍질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밤나무의 특징은 후손이 조상을 잊지 않는 원리를 담고 있다.
산신각에 올라 국사암과 삼신산을 바라보면 암자의 품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국사암 대웅전 근처에 있는 감나무 넘어 화장실인 해우소를 바라보는 것도 마음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해우소가 아주 아름답기 때문이다. 국사암 일주문 느티나무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 왼편의 편백나무가 발길을 멈추고, 앞으로 몇 발자국만 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선정에 들게 한다. 나는 시간에 쫓겨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어가면 닿는 쌍계사로 가지 못했다. 다만 차 안에 소나무 향기를 가득 담아 쌍계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