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0년 이후 29년 만에 일왕 즉위식이 열리면서 일본의 우경화 움직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나루히토 일왕이 평화헌법 개정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군국주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가 일왕 즉위식을 평화헌법 개정 방편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루히토 일왕이 상왕인 아키히토에 비해 평화주의 행보에 한층 적극적일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오지만 아베 총리 역시 국민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어 국민통합과 군국주의 견제라는 과제를 놓고 일왕과 아베 총리 간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NHK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22일 오후1시 고쿄(皇居·일본 왕궁) 내 영빈관 ‘마쓰노마(松の間)’에서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례(卽位禮) 정전(正殿) 의식’이 진행된다. 이번 의식은 126대 일왕 즉위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행사지만 아베 총리는 정권의 우경화 색채를 부각하는 데 나루히토 일왕 즉위를 이용하려 할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일왕 즉위식을 정권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움직임은 새 연호 발표 직후부터 시작됐다. 아베 총리는 4월1일 원래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이 연호와 총리 담화를 같이 발표하던 관행을 깨고 직접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발표했다. 새 연호 제정 이후에는 “새 시대, 새 나라의 모습을 만들어가자”며 평화헌법 개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다. 일왕 즉위식이 열렸던 5월1일에는 새 시대를 축하한다며 일본 전역에 사무라이 7명이 등장하는 수묵화풍의 홍보물을 선보였다. ‘신시대 개막’이라는 이 홍보물의 주인공도 총리 본인이었다.
아베 총리는 일왕 즉위식을 외교 선전의 장으로도 삼겠다는 뜻도 감추지 않고 있다. 아베 총리는 전날부터 일왕 즉위 선포 의식에 초청돼 방일하는 각국 대표들과 연쇄회담에 나섰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21일 오전 도쿄 모토아카사카 영빈관에서 이브라힘 무함마드 솔리 몰디브 대통령,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 등과 차례로 회담했다. 오후에는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하는 등 이날 하루 동안 20개국 이상의 요인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총리는 오는 25일까지 이낙연 총리와 왕치산 중국 국가부주석 등 모두 50여개국 대표와 회담할 예정이다. 이 총리와는 24일 오전 중 만나는 쪽으로 양측이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 정권이 일왕 즉위식을 활용해 우경화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나루히토 일왕이 아베 정권의 들러리 역할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나루히토 일왕은 5월 ‘헌법에 따라 일본과 일본 국민의 상징으로서 직무를 다할 것이며, 일본이 외국과 손잡고 평화와 발전을 이루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평화헌법 지지 의사를 분명히 했다. 8월15일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일에는 “과거를 돌아보고 깊은 반성 위에 서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도록 절실히 기원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재임 당시 상왕의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식을 계기로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적극적으로 낼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천황과 일본인’의 저자이자 오랫동안 ‘천황제’를 연구한 케네스 루오프 미 포틀랜드주립대 교수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일왕의 독자성을 조금 느끼고 있다”며 “나루히토 일왕은 즉위 2년 전 기자회견에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일왕의 직무도 변해간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아베 총리가 최근 50%대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우경화에 속도를 내는 점을 고려할 때 나루히토 일왕의 견제자 역할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경찰은 일왕 즉위식을 앞두고 최고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수도 도쿄를 관장하는 경찰청 산하 경찰본부인 경시청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최고경비본부’를 설치했다. 경시청을 이끄는 경시총감을 본부장으로 한 최고경비본부가 꾸려진 것은 1999년 젠닛쿠(全日空) 항공기가 납치돼 기장이 피살된 사건이 발생한 후 처음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