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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왜 하필 불행은 내게만 오는가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얘기였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 (중략) 저 나이에 어쩌면 그런 유연한 사고를 할 수가 있었을까.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진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2004년 세계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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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오만가지 슬픔 가운데서도 극한으로 꼽히는 것이 참척(慘慽)의 고통이다. 박완서 작가는 아들의 죽음 이후 통곡하고 기진하기를 거듭하다, 흰 종이에 검은 피를 토해내듯이 이 글을 썼다. 이토록 가혹한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애초에 인간을 보우하는 신이란 과연 있기나 한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고도 구차하게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가슴을 쥐어뜯는 처절한 질문 끝에 칩거한 수도원에서 그는 한 수녀의 이야기를 듣고 ‘왜 하필 내가’ ‘왜 이런 천벌이 나에게만’의 지옥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왜 나라고 이런 고통을 겪으면 안 되는가’ ‘내가 뭐관대’라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고통과 불행이 나를 유독 미워하는 신이나 운명의 치밀한 음모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의 아픔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일어나 살아갈 수 있다. 슬픔과 불행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쳐들어온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이 불행을 겪은 후의 내 삶을 ‘하필 이런 꼴’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결단이고 다짐일 뿐이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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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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