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나라 없는 설움'...터전 잃은 쿠르드족 어디로

터키·러시아 "시리아 북동부 안전지대서 쿠르드민병대 철수"

YPG, 2012년부터 다스린 시리아 북동부서 쫓겨나

목숨 걸고 IS와 전쟁 벌였지만 트럼프는 잇속 챙기며 배신

트럼프, 쿠르드에 "석유지대 가야"...국제사회 "체스판 아냐" 일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터키의 시리아 북동부 공격을 눈감아준 결과 이 일대를 지키던 쿠르드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됐다. 목숨 걸고 시리아에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를 몰아냈지만 그들의 노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됐다. 터키가 자국 내 시리아 난민을 국경지대로 이주시키기로 하면서 이 지역에 독립국을 건설하려던 쿠르드족은 미국의 유전지대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쿠르드족 가족이 지난 22일(현지시간) 터키 접경의 시리아 다르바시야에서 피난을 하던 중 도로에 잠시 머물러 있다. /다르바시야=AFP연합뉴스쿠르드족 가족이 지난 22일(현지시간) 터키 접경의 시리아 다르바시야에서 피난을 하던 중 도로에 잠시 머물러 있다. /다르바시야=AFP연합뉴스



26일 미 중앙정보국(CIA) ‘월드 팩트북’과 외신에 따르면 전 세계 쿠르드족의 수는 약 3,000만∼4,00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1,500만명 이상이 터키 동남부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 인구 약 8,100만명 중 쿠르드계 인구는 19%에 달한다.

시리아에 있던 쿠르드가 북동부를 장악한 계기는 2011년 ‘아랍의 봄’에서 비롯됐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가 2012년 여름 반군의 공격에서 수도 다마스쿠스를 지키기 위해 북동부에서 철수했고 쿠르드족이 그 사이 북동부를 장악하고 사실상 자치를 누리게 된 것이다. 특히 쿠르드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는 미국이 주도한 IS 대테러전에 참여해 IS 패퇴의 일등 공신이 됐다. 이 과정에서 YPG 대원 약 1만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터키에 쿠르드족이 몰려있는 점을 우려해왔다. 그는 터키 ‘쿠르드노동자당’(PKK)이 40여년 전부터 터키에서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을 노리고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면서 PKK와 시리아에 있는 YPG가 결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YPG는 PKK와의 관계를 전면 부인하지만 그는 국내외에서 호응해 쿠르드족의 독립을 시도할 경우 국가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면서 YPG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터키가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한 지난 9일(현지시간) 시리아 북부 라스 알아인 주민들이 피란을 가고 있다. /라스 알아인=AP연합뉴스터키가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작전을 개시한 지난 9일(현지시간) 시리아 북부 라스 알아인 주민들이 피란을 가고 있다. /라스 알아인=AP연합뉴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터키군과 시리아국가군(SNA)이 시리아 북부에서 PKK와 YPG, IS에 대한 ‘평화의 샘’ 작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후 터키군은 181개 목표를 타격하며 지상전에 돌입했다. 그는 “우리의 임무는 남부 국경 지역을 가로지르는 테러 통로의 형성을 막고 그 지역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며 “‘평화의 샘’ 작전은 터키에 대한 테러 위협을 무력화할 것이며 안전지대의 구축을 이끌어 시리아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리아 영토를 보전할 것이며 테러리스트로부터 지역 사회를 해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리아 북부에서 철수한 미군 차량들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지역인 도후크 주의 바르다라쉬 지역 인근에 도착하고 있다. /바그다드=AFP연합뉴스시리아 북부에서 철수한 미군 차량들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지역인 도후크 주의 바르다라쉬 지역 인근에 도착하고 있다. /바그다드=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이 터키의 쿠르드 공격을 묵인하면서 작전이 진행될 수 있었다. 백악관은 지난 6일 “터키가 오래 준비한 시리아 북부 군사작전을 추진할 것”이라며 “미군은 그 작전에 지원도 개입도 안 할 것이며, 인접 지역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 트위터에서 “쿠르드족은 우리와 함께 싸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돈과 장비를 지급받았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터키와 싸우고 있다”며 “나는 거의 3년 동안 이 싸움을 막았지만, 이제 이들 말도 안 되는 끝없는 전쟁에서 벗어나 우리 군인들을 집으로 데려올 때”라며 쿠르드족을 외면했다. 이에 YPG가 주축인 쿠르드·아랍 연합 전투부대인 시리아민주군(SDF)은 “미국은 이 지역에서 터키의 군사작전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다. 백악관 발표는 SDF의 등에 비수를 꽂는 행위”라며 “지금 우리를 버리는 건 비극이 될 것”이라고 규탄했다.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에르도안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면서 쿠르드족의 독립국 건설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지난 22일 푸틴 대통령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 정오부터 150시간 이내에 YPG와 중화기들을 시리아와 터키 국경 30㎞ 밖으로 철수시키는 데 합의했다. 터키군과 러시아군은 YPG의 철수를 확인하기 위해 시리아와 터키 간 국경으로부터 폭 10㎞에 걸친 터키 군사작전구역에서 합동순찰을 실시하기로 했다. 시리아 북부에 ‘안전지대’(완충지대)를 만들겠다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바람이 이뤄진 셈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프라테스강 동쪽의 시리아 국경을 따라 길이 444㎞, 폭 30㎞에 달하는 안전지대를 만들고 여기에 터키 내 시리아 난민 360만명 중 100만명을 이주시키겠다고 주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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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는 혈맹을 배신한 트럼프 대통령의 인위적 ‘인구 지도’ 개편에 휘말릴 운명에 처했다. 시리아 주둔군을 철수시키려던 트럼프 대통령이 동부 유전을 지키기 위해 일부 병력을 남기고 쿠르드를 유전지대로 이주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4일 트위터에서 마즐룸 압디 SDF 사령관과 전화 통화를 했다며 이런 구상을 공개했다. 그는 “그(압디 사령관)는 우리가 한 일에 감사했고, 나는 쿠르드가 한 일에 감사했다”면서 “아마도 쿠르드인들이 석유 지대로 향할 때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이 단순히 SDF의 이전 배치를 뜻하는지 쿠르드족의 대량 이주를 말하는 것인지 불확실하지만 쿠르드를 배신한 그가 미국의 이득을 취하려 다시 쿠르드를 이용하려 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얀 에옐란 노르웨이난민위원회(NRC)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과 관련해 “시리아에 있는 군사 세력 모두에게 이 땅은 체스판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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