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를 치기 위해 김유신이 5만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모인 위세가 엄청나 지명도 군위(軍威)가 됐죠. 삼국시대 이야기는 많이 전해지지만 이곳이 종교 문화재의 보고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경북 군위군에서 만난 최석호 서울신학대 교수의 말이다. 군위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 교수의 말처럼 군위는 인각사 외에 김수환 추기경 생가, 문화재로 등록된 교회 등 다채로운 종교 유적들이 어우러진 종교 성지이기도 하다. 특히 군위읍 동부리에서 100년째 자리를 지키는 군위성결교회는 남녀가 유별했던 한국의 유교 사회를 파고들기 위한 근대 한국 기독교의 고민과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
1920년 문을 연 교회는 일제강점기를 맞아 수차례 고초를 겪어왔다. 1941년 담임목사였던 최헌 목사는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시국강연 등을 요구하는 일제에 맞서 애국사상을 담은 노래를 합창해 교역자들과 함께 투옥됐고, 교회는 1943년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 교회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45년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됐던 천세광 목사가 고향 군위로 돌아오면서다.
인구 2만3,000여명에 불과한 군위에서 이 교회 등록신자 수가 700여명에 달하는 데는 교회에 깃든 항일 정신과 순직 정신이 무관하지않다는 교회 측 설명이다. 1993년부터 사역해 온 허병국(60) 담임목사는 “지역봉사 외에 항일운동을 벌인 점이 주민들로부터 높게 평가받아 많이 찾아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37년 지어진 문화재 예배당은 유교가 뿌리내린 당시의 시대상과 기독교의 남녀평등 사상을 반영하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예배당에는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두 개의 아치형 문이 나 있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당시 교회를 설계한 임도오 목사가 조선의 유교적 특색을 고려해 남녀가 각각 다른 출입문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며 “그럼에도 크기와 모양이 같은 것은 남녀평등 사상을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세월이 흘러 예배당이었던 건물은 유치원으로 변하고, 지금은 외국인들을 위한 한글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교인이 늘며 예배당을 헐고 신·증축을 했을 법도 하지만 허 목사는 “순직의 피가 묻은 건물에 함부로 손댈 순 없었다”고 했다. 그는 “임 목사가 오기 한해 전 원래 있던 한옥 예배당을 철거하다가 이종익 목사와 노성문 집사가 낙상으로 순직했다”며 “이후 예배당을 헐지 않는 것이 교회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예배당 뒤편에는 “무너진 터, 흘러 있는 피 위에 성전 건축을 착수했다”는 이종익 목사와 노성문 집사 순직비가 서 있다.
항일정신과 건물의 역사성을 인정받아 교회는 문화재청이 올해 선정한 ‘생생문화재 사업’ 290곳 중 기독교 문화재 사업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내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교회는 보다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찾아갈 것으로 보인다. 허 목사는 “원형을 모두 복원하기에는 관련 사료가 부족했다”며 “내년 100주년을 맞아 십자가, 종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군위성결교회에서 차로 7분 거리 군위금성로엔 고(故) 김수환 추기경 생가와 기념 공원이 있다. 군위 용대리는 김 추기경이 유년시절을 가장 오래 보낸 곳으로 그의 아호 ‘옹기’도 여기서 비롯된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4살이 되던 해 용대리로 이사를 왔다. 김 추기경의 어머니는 옹기굴에서 일하며 자식들을 키우고 누추한 초가삼간에 신부님을 모셔 공소를 열었다. 아호 ‘옹기’는 선조의 신앙심과 부모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것이다. 이 곳에 조성된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은 옹기를 테마로 그의 생애와 업적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글·사진(군위)=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