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유리 천장'과 '유리 바닥' 사이

<정민정 논설위원>

교육·노동시장서 '기회 사재기'

경쟁의 판 조작해 계층이동 막는

상위 20% 중상류층에 불만 커져

잃어버린 '공정'의 가치 복원 시급

정민정 논설위원정민정 논설위원



중국 윈난성 해발 3,000m 고산지대에 자리한 다랑논은 1,300여년 전 한이족이 이주해 일궈낸 계단식 논이다. 계곡에서 해발 1,800m 사이에 1,500계단의 논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은 노을빛과 어우러져 세계적인 장관을 선사한다. 하지만 윈난성 다랑논이 유명한 것은 아름다운 풍광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에는 물과 농지, 그리고 노동의 공정한 분배가 있었다. 각각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물꼬를 골고루 터줬고 가파른 논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분담하기 위해 집마다 위 논과 아래 논을 균등하게 나눴다. 이처럼 출발부터 공정한 경쟁이 1,000년 넘게 이 공동체를 지탱한 바탕이 됐다. 열심히 일한 만큼 공정하게 보상이 이뤄진다는 신뢰와 개인의 나태는 공동체의 공멸로 이어진다는 건강한 공동체 의식이 일군 역사적인 성취다.

윈난성 다랑논의 남다른 성취가 오늘 우리에게 부쩍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공정’에 대한 목마름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두 달간 블랙홀처럼 대한민국을 빨아들인 ‘조국 사태’는 ‘불평등’이라는 단어를 광장으로 소환했다. 전통적으로 진보진영에 속했던 대학생들이 앞장서 ‘조국 퇴진’을 외쳤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비리 의혹과 최순실씨 딸 정유라의 입시부정을 동일시했다. 이유는 간명하다. 출발선에 설 기회조차 박탈당한 젊은이들에게 ‘공정’은 그 어떤 담론이나 이념보다 상위의 가치일 수밖에 없어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덮은 ‘불평등’ 이슈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월가를 뒤흔들었던 ‘1 vs 99’ 논란과도 결이 다르다. 당시에는 최상위 1% 슈퍼리치에 대한 대중적인 분노이자 부유층의 탐욕에 대한 인간적인 분노였다.

관련기사



하지만 지금은 상위 20% 중상위층을 정조준한다. ‘20 vs 80의 사회’ 저자인 리처드 리브스는 “상위 20% ‘중상류층’이 소득과 양육·교육·연줄 등 가용 자원을 총동원해 구축한 안전판은 그 자녀들을 떠받치는 ‘유리바닥’이자 하위 80%에게는 계급이동을 막는 유리천장”이라고 규정한다. 저자는 “대물림을 위해 교육과 노동 시장에서 동원되는 ‘기회 사재기’ 전략은 불법이든 아니든 그 자체로 경쟁의 판을 조작하는 행위”라고 꼬집는다. 상위 20% 계층이 상위 1%를 비난하며 자신들은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취했다고 강변하지만 실상 계층 간 이동을 가로막는 주범은 1%가 아닌 20%에 속한 중상위층이라는 지적이다. 때마침 세계 3대 영화제에 꼽히는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올해 ‘기생충’과 ‘조커’가 최고상을 수상했다. 두 작품 모두 경제·사회적으로 소외된 주인공들이 상위 20%가 촉발한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극단적으로 표출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는 국가·시민사회·시장을 가로지르는 ‘권력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386세대에 대한 불만이 짙어지고 있다. 우리 시대는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면서 역설적이게도 그 괴물을 닮아갔고 시대를 지켜낸 자부심이 우쭐한 자만심으로 변질됐으며 거악(巨惡)에는 분노하면서도 일상 속 작은 악들에는 관대했던 386세대의 이중성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으려 한다. 최근 세대론에 불을 지핀 ‘386세대유감’에서 저자들은 “386세대가 ‘혁명적 투사’에서 ‘사회 기득권’으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우리 사회에는 부동산 투기 광풍과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의 고착화 같은 각종 병폐가 쏟아졌다”며 386세대의 암묵적 방조와 가담, 미필적 고의를 공범으로 지목했다.

복잡다단한 21세기 대한민국에 윈난성 다랑논의 성공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하나 정도는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가 잊어버린 혹은 잃어버린 ‘공정’이라는 가치를 복원하는 것. 그 속에서 혁신성장도, 지속가능한 공동체도, 세대 간 화해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믿는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정민정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