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10건 중 9건은 국내기업간 기술유출…잇단 소송에 '진흙탕 싸움'만

[기술 해외유출 '솜방망이 처벌']

기업간 신뢰 무너뜨려 경제 악영향

퇴직후 동종업체 취업제한 강화 등

기술유출 막는 제도적 보완책 시급




국내 업체의 원천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는 것도 골칫거리지만 국내 기업 간 기술탈취 관련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최근까지 중국 등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 기업의 기술을 빼내 가는 게 문제로 지적됐지만 국내 기업끼리 기술유출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례도 꾸준히 느는 추세다. 실제로 경찰청이 지난 4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 산업기술유출범죄를 집중 수사해 적발한 90건 중 88.9%인 80건이 국내 기업 간 기술유출로 나타났다.

전기차 배터리 기술유출 문제를 두고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국내 기업 간 기술유출 분쟁의 대표 사례다. LG화학이 올해 4월 배터리 제조 관련 인력 76명 유출에 따른 영업비밀 탈취 혐의로 SK이노베이션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에 제소한 후 양사는 국내에서 잇따라 상대방을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올 9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이 회동해 접점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후 지금까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퇴직자의 SK하이닉스 재취업을 둘러싸고 ‘전직(轉職)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것도 국내 기업 간 기술유출 갈등의 한 사례로 꼽힌다.


국내 대기업이 협력사인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는 것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중소 자동차부품 제조업체 A사는 정식 납품 제안 단계에서 거래처가 설계자료·도면·부품 및 특허 관련 자료 일체를 요구해와 납품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공했다. 기술 자료를 모두 넘기자마자 거래처는 A사와 거래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거래처가 다른 협력업체에 기술 자료를 넘긴 뒤 납품까지 맡긴 것이다. A사는 거래처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B사는 복제 프로그램을 통해 거래처로부터 전자결재 시스템 기술을 탈취당해 다른 기업과의 인수합병(M&A)에도 차질을 빚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관련기사



앞으로 국내 업체 간 기술유출 분쟁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들이 이미 포화상태인 국내를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원천기술이 회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같은 우리나라 기업이라고 소송을 접거나 합의를 볼 가능성이 적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와는 달리 다른 업체와의 협업과 개방형 시스템을 통해 기술을 개발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 간 기술유출 건수도 더 늘어날 것”이라며 “이는 기업 간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경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술유출을 막기 위한 제도적 보완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우 임직원들의 퇴직 이후 동종업체 취업제한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굉장히 느슨하게 운영되고 있다”며 “관련 규정을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첨단기술을 가진 퇴직자들이 바로 동종업체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통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정부가 더 세심하게 관리해야 한다”며 “기업도 스스로 지금보다 더 기밀유출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술유출 분쟁 당사자들이 합리적인 선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변호사는 “국내 기업 간 분쟁이 자칫 치킨게임으로 번져 라이벌 외국 기업의 이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직업 선택의 자유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국익의 관점에서 소모적인 분쟁을 멈추려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동훈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