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 건설이 한창이던 1970년 2월3일. 박태준 사장이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았다. 박태준은 “설비 구매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구매 과정에서 청탁이 극심하자 대통령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금 말한 내용을 간략히 적어보라”며 메모지를 내밀었고 박태준은 구매원칙과 대책을 적어나갔다. 박 대통령은 즉석에서 ‘포철이 자금 운용과 구매에 전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을 박태준에게 쓰게 한 뒤 메모지 왼쪽 위 모서리에 친필 서명을 했다. 박태준은 이 메모를 10년여 간직했다. 포스코 사람들은 이를 ‘종이마패’라 불렀다. 어떤 외풍에도 휘둘리지 않게 대통령이 방패막이로 나선 덕에 포스코는 세계 제1의 제철소로 우뚝 섰다.
산업화의 굴곡진 세월을 보낸 지금, 기업인에게 박정희의 종이마패는 어떻게 다가올까.
1월15일 청와대 영빈관.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기업인 130명을 대표해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슴속 말을 꺼냈다. “서구에선 300년 걸려 이룬 산업화를 저희는 반세기 만에 이뤘습니다. 우리 기업은 청소년기입니다. 왕성한 시기에 실수도 하지만 앞을 향해 뛰는 기업들을 봐주십시오.” 반기업 정서에 대한 그의 답답함은 오늘날 우리 기업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줬다.
임기 반환점을 돈 지금 문 대통령은 기업인들에게 서운할 것이다. 유독 그들에게서 호의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기업인 설문을 보면 경제정책 평가는 D, 잘해야 C다. 기업의 해외 이탈은 연일 최대다. 한 달에 수차례 경제현장을 찾는데 그들은 왜 이리 마음을 닫는 것일까.
문 대통령을 보좌하는 복수의 관료는 취임 첫 일정으로 인천공항공사를 찾아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한 일이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지지층을 배려하려다 소득주도 성장이 정책의 전부인 것처럼 낙인찍혔다는 것이다. 감성에 기댄 정책의 대가는 가혹했다. 현실은 거꾸로였다. 고용 유연성이 없는 민간 기업들은 비정규직을 되레 늘렸다. ‘선의의 역설’이다. 국정의 다른 한 축이던 혁신성장의 이미지는 무너졌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서 루이스는 경제주체들의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 to economize)’를 개발의 관건으로 꼽았다. 한 나라 경제주체들의 의지를 살릴 책임은 대통령의 몫이다. 문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 출발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지난해 7월 상·하원 연설은 루이스의 말과 맞물려 울림을 준다. “기업을 돕는 정책은 부자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이다. 기업을 지키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은 오산이다.” 10%를 넘던 프랑스 실업률이 8%로 내려가고 창업 기업이 두자릿수로 늘어난 것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법인세 인하 등 친기업 정책이 노동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와 어우러져 프랑스 기업인을 춤추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은 기업인과 동행할 수 없을까. 어렵지만 쉬운 일일 수 있다. 열쇠는 바로 대통령의 ‘진심’이다. 기업인 100여명과 동시에 만나 커피잔을 들고 청와대 뜰을 걷는다고 투자의 문을 열 것이라 봤다면 착각이다. 그런 연출은 ‘가식’이다. 경제전쟁을 치르고 있는 기업인과 단 한명이라도 밤새 막걸리잔을 부딪히며 살아 있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현장에서 어떤 규제가 목을 조이는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망한 기업인의 처절한 얘기에도 귀를 열어야 한다. 그런 일이 쌓이고 쌓여야 진심이 전달된다.
지난해 타계한 빔 콕 전 네덜란드 총리는 노총위원장 시절 나라가 과도한 복지로 위기에 빠지자 배신자 소리를 들으면서 바세나르협약을 맺어 ‘네덜란드 병’을 치유했다. 기업인들은 화려한 비전을 선포하는 모습이 아니라 투자를 막고 있는 이해집단·노조와 끝장 토론을 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좌를 설득하는 좌파 대통령’이다. 그것이 기업인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의 마패’요, 지금 대한민국이 원하는 대통령의 모습이다. /김영기 논설위원 yo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