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대형 기관투자자는 두 개의 투자건을 손에 들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기업 계열사 두 곳이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 투자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투자 기회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대기업 투자라 평소라면 큰 고민 없이 투자를 집행했을터다. 그러나 이번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두 회사는 같은 업종에 속해 있는데다, 구조상 경쟁이 불가피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계열사 A는 이미 선두주자로서 시장을 선점했지만 산업이 포화해 확장이 어려운 대형 사업자였다. 또 다른 계열사 B는 연간 실적이 검증되지 않은 초기 기업이지만 성장 가능성이 컸다. 국민과 고객들의 자산을 운용하는 ‘큰 손’ 투자가들은 이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줬을까.
앞서 언급한 A와 B사는 SK(034730)T의 자회사 ‘티브로드’와 ‘웨이브(Wavve)’다. SK그룹의 미디어 자회사가 동시에 시장에서 6,000억원 규모를 자금을 조달하는 가운데 양사의 희비가 엇갈렸다. 비슷한 투자조건을 내놓고 방송 분야의 ‘구(舊)산업’과 신(新)산업이 맞붙었는데 기관투자자들은 IPTV와 케이블TV 대신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선택했다. 이번 사례는 큰손 투자자들이 국내 미디어 지형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6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대우(006800)는 SK텔레콤(017670)의 자회사 SK브로드밴드와 티브로드의 합병법인에 투자를 확정한 이래 연기금·공제회 등 기관 투자자를 중심으로 자금 모집을 진행 중이지만 투자 유치 결정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참여자를 확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4월 SKT는 미래에셋대우를 재무적투자자(FI)로 유치하고 지분 8.02%를 약 4,000억원에 넘기기로 했다.
반면 SKT가 진행하고 있는 OTT 웨이브는 지난 7월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승인을 받은 이후 티브로드에 비해 늦게 투자자 모집에 들어갔지만 먼저 자금 모집에 성공했다. 앵커(주요)투자자로 교직원공제회가 1,000억원을 집행했고 농협중앙회와 국내 대형 증권사, 캐피탈사 등 20여곳의 금융 기관이 투자 의사를 밝혔다. 공동 GP(운용사)인 미래에셋벤처투자 PE본부와 SKS PE는 이달 말 클로징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 중이다.
잠재적 경쟁자인 기존 방송통신사업자와 OTT의 투자 요청이 동시에 들어와 기관들도 난감했다는 후문이다. 한 그룹사에서 나온 투자 건인데다 시장 점유율을 빼앗을 수 있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어 두 건 모두 투자하기엔 이해상충 문제가 우려됐다.
국내 방송통신시장 환경은 방송ㆍ통신 융합‘ M&A(인수합병)으로 유료방송 시장이 재편되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통신사의 독과점을 우려했던 공정거래위원회도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공세에 따른 미디어 지형의 변화를 인지하고 SKB·티브로드도 이달 중순 합병 승인을 내줬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관들이 ’웨이브‘를 선택한 것은 미디어 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케이블 TV와 합종연횡해 비대해진 통신사들이 OTT가 빠르게 확장하는 미디어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도 넷플릭스, 아마존, 디즈니 같은 초대형 기업의 영향력이 확대하면서 유료방송을 해지하고 OTT에 가입하는 ’코드커팅‘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플랫폼이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체적인 콘텐츠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데 기존 방통사업자들은 이 점에서도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디바이스가 확대되면서 국내에서도 코드커팅이 가속화되고 있고, 구독경제 모델이 자리잡고 있어 OTT에 기관투자자가 손을 들어준 것 같다”고 언급했다.
‘티브로드’와 ‘웨이브’의 자금 조달을 맡았던 미래에셋금융그룹 내부에서도 온도차가 보인다. 웨이브 투자를 담당했던 미래에셋벤처투자는 순항했다. 반면 티브로드 투자를 담당하는 미래에셋대우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내년 1월 초 합병기일을 기점으로 미래에셋대우가 주식을 인수하게 되는데 재매각(셀다운)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본적정성 저하가 우려된다. 미래에셋대우는 최근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PI(자기자본투자)를 검토 중인데다 올해 미국 주요 도시의 호텔 15여곳에 7조원을, 네이버파이낸셜에 5,00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바 있어 건전성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