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법조계는 사법부가 최근 노동 분야에서 전향적 판결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근원에는 대법원의 인적구성 변화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입을 모은다. 현 정부 들어 노동 분야를 전공했거나 진보적 성향을 띤 대법관들이 대법원에 대거 합류하면서 사법부의 판도도 완전히 뒤집어졌다는 분석이다.
대법원 재판부는 지난해 8월2일 김선수·이동원·노정희 신임 대법관이 본격 취임하면서 전체 대법관 14명 중 8명이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으로 채워졌다. 여기에 같은 해 12월 김상환 대법관의 합류로 현 정부 인사는 총 9명으로 늘었다. 특히 법원 내 진보 성향 단체로 꼽히는 우리법연구회 창립멤버인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을 역임한 김선수 대법관, 우리법연구회와 민변을 모두 거친 노정희 대법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의 김상환 대법관 등 상당수가 현 정부 철학에 반하지 않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인사들이다. 지난해 10월 원고 승소로 마무리한 일제 강제징용 판결과 같은 해 11월 문 대통령 임명 대법관 7명이 전원 무죄 의견을 내며 최종 결론을 견인한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 ‘여순 반란 사건’ 재심 결정 등은 대법원 구성 변화의 위력을 확인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퇴진과 반대 성향 대법관들의 증가는 최근 노동사건 판결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업의 사용자보다는 노동자들의 편에 선 결론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올 2월 육체노동 연한을 기존 60세에서 65세로 30년 만에 변경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그 정점으로 언급된다. 이 판결로 정년·연금제도·보험료율·청년취업 등 사회 곳곳에서 노동의 가치 계산이 전혀 달라지게 됐다.
경영상 어려움을 따지는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과 통상임금 판결에서는 기업들이 줄패소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다스를 시작으로 올 2월 시영운수, 4월 예산교통, 5월 한진중공업과 한국남부발전까지 회사들의 각종 경영난을 무엇도 인정하지 않았다.
근로자의 지위는 높아지고 업무상 재해 범위는 날로 넓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와 올해 특수고용 학습지 교사와 방송 연기자, 구두 제화공, 자동차대리점 영업사원인 ‘카마스터’, 철도역 위탁매점 운영자까지 모두 노조법상 근로자가 맞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지난해 9월과 11월에는 월요일 오전 상담전화를 받다가 갑자기 쓰러진 콜센터 상담원과 노조활동을 하다 우울증이 생긴 직장인에 대해, 올 4월에는 세차를 하다 쓰려져 숨진 전세버스 운전기사에 대해 각각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대법원 구성 변화만으로 사법부 전체의 판결 기조가 바뀌는 것은 그만큼 대법관들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3,000여명의 판사들은 이전 정부나 지금이나 그대로이지만 대법관 14명(법원행정처장 포함)의 구성 변화만으로도 하급심 결과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구조다. 5일 임금피크제를 포함한 취업규칙 판결처럼 대법원에서 한 번 판례를 만들면 이후부터는 하급심 재판부도 그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재계와 법조계는 앞으로 노동사건에서 진보적 판결 기조가 더 강해질 것으로 예측했다. 오는 2021년까지 대법관 4명이 더 교체될 예정인 만큼 문 대통령은 임기 안에 14명의 대법관 가운데 13명을 자신이 임명한 인사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선출직은 행정부 수장뿐인데도 삼권분립의 근간인 사법부까지 행정부 논리에 쏠리는 진영논리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에 따른 정의를 집행하는 사법부가 특정 정치이념에 휩쓸리는 것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사법부 불신을 일으키는 매우 위험한 신호”라며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사법부가 이렇게 특정 정치이념과 정치세력에 급격히, 단기간에 쏠린 적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없었다”고 말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반적으로 대법관 구성의 진보적 색채가 판결에도 나타나고 있다”며 “그간 대법원에 의해 크게 논란이 안 된 이슈가 원점에서 다시 논의된다거나 하는 부분을 보면 현 정부의 성향을 대법원도 일부 반영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다.
/윤경환·이지성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