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김우중 대우회장 별세] 빠르게 비상한 만큼 빠르게 추락한.. 김우중의 대우

지난 1999년 4월 19일 대우그룹의 구조조정을 발표하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서울경제DB지난 1999년 4월 19일 대우그룹의 구조조정을 발표하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서울경제DB






대우그룹은 한국경제의 압축성장을 상징한다 할 만큼 빠르게 성장했으나 또 그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10평 남짓 사무실에서 출발한 대우그룹은 한 때 국내 대기업 중 자산규모 2위까지 올라섰으나 창립 30여년만에 불명예스럽게 해체됐다.


대우그룹은 1967년 3월 22일 대우실업이 문을 열며 시작됐다. 트리코트 원단 수출의 귀재라 이른바 ‘트리코트 김’이라 불리던 청년 김우중은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빌려 셔츠 내의류 원단을 동남아시아에 내다 팔았다. 김 전 회장의 수완과 정부의 수출진흥정책을 양날개로 달고 대우실업은 급성장했으며 기업 인수·합병을 통해 ‘다계열, 다업종’ 확장에 나섰다.

당시 사업 확장 속도는 숨가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다. 대우는 1973년 한 해에만 대우기계, 신성통상, 동양증권, 대우건설 등 10여개의 계열사를 인수했으며 1976년에는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과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다. 1978년엔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983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4년 세운 대우전자는 1983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더해 주력기업으로 키웠다. 대우그룹의 상징이던 서울역 대우센터 빌딩은 1977년 완공했으며 지상 23층 규모의 사옥은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대우그룹은 1982년 대우실업을 ㈜대우로 바꾸고 그룹 회장제를 도입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같은 성장 일변도의 정책은 1990년대 들어서도 유지된다. 1993년에 ‘세계경영 우리기술’을 슬로건으로 폴란드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는 등 동구권 시장 개척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당시 대우맨들의 영업력은 유럽 내에서도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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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대북협력사업의 일환으로 첫 남북한 합작투자회사인 민족산업총회사를 북한 남포에 설립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에 쌍용차도 인수했다. 이 같은 공격적 확장을 바탕으로 1998년에는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법인을 거느리며 자산 기준으로 삼성과 LG를 제치고 재계 2위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당시 국내 10만5,000여명, 해외사업장 21만9,000여명으로 임직원이 30만명이 넘어서기도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외형 확장이 무리한 차입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이 같은 ‘대마불사’ 신화는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무리하게 빚을 내 과잉투자를 하는 차입경영의 허점이 드러났으며 외형확대에 치중하느라 다른 그룹에 비해 구조조정이 늦었다. 특히 국가신용등급 추락 여파로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거세지고 해외 자산가치가 추락하자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1998년 12월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안이 발표했지만 추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삼성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내주는 이른바 ‘빅딜’ 계획이 실패하며 이듬해 8월엔 12개 주요 계열사가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다.

2000년에는 수십조원 규모의 분식회계가 적발되며 대우그룹은 회생 불능 사태가 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는 1997년 19조여원, 1998년 21조여원 수준이다.

재계 관계자는 “대우그룹은 한국 경제성장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분식회계와 부실경영으로 국가 전체를 휘청이게 한 만큼 공과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양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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