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국립오페라극장 ‘팔레가르니에’ 앞마당에 흰 발레복 차림의 무용수들이 깜짝 등장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에서 은퇴가 빠른 발레단의 특성을 외면한 채 연금 체계를 단일화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파리국립오페라 소속 무용수들이 시민 수백명 앞에서 항의 공연을 한 것이다. 정부와 노동계가 연금개편을 둘러싸고 평행선을 달리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가족을 만나려던 시민들은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발이 묶였다.
노조 파업 20일째인 이날 오후3시께 파리국립오페라 발레단 무용수 약 40명은 팔레가르니에 앞마당에 마련된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연주에 맞춰 20분간 공연을 펼쳤다. 파리 심포니오케스트라 악단은 연주를 맡아 지원사격에 나섰다.
프랑스 문화부 산하기관인 파리국립오페라는 3주간 이어진 노조 파업으로 이날도 예정된 공연을 취소했다. 팔레가르니에는 파업에 따른 공연 취소로 지금까지 800만유로의 손실을 봤다. 또 다른 국립극장인 코메디프랑세즈를 포함한 공공기관들은 이달 5일부터 시작된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무용수들이 이날 무대에 오른 것은 정부의 일방적인 연금개편을 거부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무대 뒤에 설치된 현수막에는 빨간색과 검은색 글씨로 ‘파리 오페라는 파업 중’ ‘문화는 위기 상황’이라는 문구가 쓰였다.
마크롱 정부는 직종에 따라 42가지에 이르는 퇴직연금 제도를 포인트제 기반의 단일연금 체계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은퇴연령은 현행 62세로 유지하지만 연금을 온전하게 받을 수 있는 나이를 64세로 정해 64세 은퇴를 유도하려 한다. 연금개편으로 국가재정의 부담을 줄이고 직업 이동성을 높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의도다. 정부가 이번 연금개편에 실패하면 2025년까지 연기금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0.7%인 170억유로로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프랑스 노조는 개편안이 더 일하고 적게 받는 폐해를 낳을 것이라며 5일 첫 총파업을 선언한 뒤 이날까지 파업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이 국민적 저항에도 연금개편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을 고수하면서 정부와 노동계 간 갈등이 20일째 이어지고 있다.
무용수들은 정부가 자신들이 직업 특성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연금제도를 단일화하면 50년이 넘도록 일하고 연금 수령액은 줄어들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1669년 루이 14세가 창설한 ‘왕립음악원’이 기원인 파리국립오페라는 소속 가수와 무용수들이 42세부터 은퇴해 최소 1,067유로(약 138만원)를 받을 수 있는 퇴직연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루이 14세가 1698년 오페라 감독 장 밥티스트 륄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아내와 자녀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명령한 데서 시작된 이 제도는 42가지 퇴직연금 중 가장 오래 유지돼왔다. 파리국립오페라단 소속 무용수 알렉스 카르니아토(41)는 “64세까지 무대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17~18세가 되면 고질적인 부상과 골절, 무릎 문제에 시달린다”고 강조했다.
다른 정부 산하기관들과 전문직 종사자들도 연금개편안이 직업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일방통행식 조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국영철도청(SNCF) 철도기관사는 특수연금의 혜택을 받아 50세가 넘으면 은퇴한 뒤 퇴직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새 제도가 시행되면 10년 이상 더 일해야 한다. 의사·변호사·간호사 등 전문직 노동자들도 정부가 연금개편을 추진하던 9월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런 반발을 의식해 정부는 조기 은퇴하는 특수공무원들에게 일반퇴직자와 비슷한 연금액을 보장하는 등 양보안을 제시했지만 단일화의 뜻은 굽히지 않아 노조와의 강대강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가 18~19일 노조 대표단과 만나 크리스마스 파업 중지를 요청했지만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해 이날까지 파업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에 가족을 만나려던 시민들이 기차표를 구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영국 BBC방송은 “파업에 따른 교통난으로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