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멜로 감독 허진호(사진). 사랑의 설렘, 질투, 이별의 슬픔 등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감정을 차분한 톤에 담아낸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호우시절’ 등 ‘한국 멜로 베스트’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멜로 감독인 줄만 알았는데, 허 감독은 2016년에는 ‘덕혜옹주’로 사극에 도전했다. 첫 사극임에도 그 특유의 감성적인 연출이 호평을 받으며 559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사극에 멜로(브로맨스) 장르를 입힌 두 번째 사극인 ‘천문 : 하늘에 묻다’ 역시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150만 명 가량을 동원하며, 꾸준히 박스오피스 2위를 지키며 장기 흥행에 돌입했다.
최근 종로구의 한 카페서 만난 그는 ‘천문’은 세종대왕과 장영실이라는 ‘조선의 두 천재’의 인간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라고 했다. 세종이 사대부를 견제하고 명나라에 의존하지 않는 천문 기술을 만들기 위해 장영실이 필요했고, 장영실 역시 자신을 인정해주는 왕이 필요했던 ‘정치적 관계’라기보다 우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사료를 찾아보면 왕의 말을 영실이 대신 전했다라는 기록도 있다”며 “영화에서 세종(한석규)이 영실(최민식)에게 어렸을 때부터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고 이야기하면서 같이 바닥에 눕는 장면들이 바로 둘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종은 영실을 벗으로 생각하고, 영실은 자신을 인정하고 면천까지 시켜주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 세종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을 것이고, 여기에 자신을 벗으로까지 생각하는 세종에 대한 애정을 그 장면에 담은 것”이라며 “세종은 영실을 수평적인 관계로까지 생각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허 감독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 바로 안여사건(장영실 감독 하에 만들어진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가 부서지고 장영실이 파면됨)이다. 이 사건 이후로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허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조사했는데, 유시민 작가가 세종에게 장영실을 왜 내쳤냐고 물어보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저도 굉장히 궁금했다”며 “세종은 큰 잘못을 했어도 항상 인재들을 중용해서 다시 썼는데, 벗으로 까지 생각하던 영실을 곤장 80대나 쳐서 내쳤는지 궁금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중용해서 다시 썼더라면 아마도 한국의 과학이 더욱 발전했을 것”이라며 “자동 시보 장치인 자격루 같은 것은 아라비아, 중국 그리고 한국만 갖고 있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시간을 만든 천재인데 아쉽다”고 부연했다.
장르는 사극이지만 역시 허 감독의 특기인 멜로 감성인 영화의 전반적인 톤이다. 이제는 ‘멜로 사극 장인’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모든 공을 배우 최민식과 한석규에게 돌렸다. “긴장감 있고 미스터리한 요소가 있지만 정말 주된 이야기는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다. 벗으로 생각하는 둘의 감정을 최민식과 한석가 서로 조화가 잘된 악기 연주처럼 표현했다. 이를테면 바이올린과 비올라라는 두 악기가 아주 조화롭게 맞물린 합주, 이중주를 듣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바로 멜로 톤을 만들어 낸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의외의 웃음을 선사하는 세종의 ‘개새끼야’라는 대사가 만들어진(?) 비화도 들려줬다. 그는 “세종이 분노하는 장면부터 촬영이 들어가는데, 그 전에 한석규가 감정을 잡기 위해 ‘개새끼야’라고 한 장면이 찍힌 걸 편집 과정에서 봤다”며 “그게 재미있어서 한석규에게 이 걸 써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썼다”고 전했다.
최민식과 한석규 ‘두 연기의 신’ 말고도 ‘천문’에는 신구를 비롯해 허준호, 김원해, 윤제문, 임원희, 김태우 등도 ‘믿고 보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신구는 왕이 3번 바뀌는 동안 영의정 자리를 계속해서 지킨 인물로, 허준호는 조말생으로 김원해, 윤제문, 임원희 3인방은 장영실의 주변 인물로, 김태우는 정남손 역을 각각 연기한다. “신구 선생님은 후배들이 정말 존경하는 선배고, 현장에 계신 것만으로도 중심이 돼 주셨다. 허준호는 정말 이번에 아주 늙은 여우 같은 그 얼굴이 너무 좋았다. 김원해, 윤제문, 임원희는 세 명을 그냥 앉혀 놓는 것만으로 조합이 좋았다. 이들 때문에 사극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유쾌하고 경쾌하다.”
본래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허 감독은 차기작에서도 과거로 눈을 돌릴 예정이다. 허 감독은 “1970년대 통기타 시대를 다룬 작품 구상 중”이라며 “계속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