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혁신본부장 자리를 맡기 전 30여년을 신약개발 연구자로서 연구현장에서 보냈다. 정부의 신약개발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보건복지부·산업부 등 여러 부처에서 지원하는데, 사업을 수행하는 연구자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부처별로 서로 다른 연구관리 규정을 일일이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험용 시약을 하나 구매하더라도 혹시 규정을 어기지 않는지 조심해야 하고, 규정 해석에 대해 명확하고 신속한 답을 얻기는 어렵다. 결국 부처의 규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주어진 기간 내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연구자의 몫이었다.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된 후 부처별 연구개발(R&D) 관리규정이 280여개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잡한 관리규정으로 현장에서는 연구자들이 마음껏 연구하기 어렵다는 호소가 이어지고 있고,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학 연구자는 업무시간의 62.7%를 행정업무에 할애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여러 부처의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은 의욕적으로 과제를 수행할수록 규정을 어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런 연구현장의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도 여러 노력을 해왔다. 특히 지난해 연구비 관리시스템을 통합하고 범부처 관리규정 표준안을 발표하는 등 의미 있는 진전이 있었다. 또한 올해와 내년에 거쳐 연구자 및 과제 관리시스템도 순차적으로 통합해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R&D 관리를 위한 법률이 정비돼야 한다. R&D 관리규정은 개별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어 동시에 표준화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표준화된 규정이 다시 달라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지난 10여년 동안 부처별 R&D 관리규정을 체계화하기 위한 법률 제정 논의가 있어 왔으며, 2018년 말 ‘국가연구개발 혁신을 위한 특별법안’ 발의로 연구현장에서는 큰 기대와 지지를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돼 있고 이번 20대 국회에서 통과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올해 R&D 예산은 역대 최고치인 24조2,000억원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예산 확대에 걸맞은 법과 제도의 혁신이 필요하다. 24조원의 예산을 사용하는 주체는 결국 연구자들이며,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어야 혁신적인 성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천문분야 연구자들과 함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관람했는데, 영화 내용 중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세종과 장영실의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유대감이었다. 연구자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믿고 지원해주는 것, 연구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가 연구개발 혁신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연구자들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든든한 뒷받침이 돼줄 것이다. 법안이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될 수 있기를 바란다.